예전에 승선했었던 배를 다시 만날 때 느끼는 마음.
새벽 두 시, 사우스 아프리카 리처드 베이 항. 오랜만에 찾아온 항구이다.
뿌옇게 물감칠을 하여 보름밤 달빛의 투명함을 앗아간 연무가 시계를 흐리고 있는 가운데 조심스레 접근하는 투묘지에는 모두 6척의 배들이 선착하여 불빛을 밝힌 채 닻을 내려주고 있다.
좀 전 항만당국으로 항계 내 6마일 경계선 도착 통보를 해주면서 배정받은 투묘지를 향해 숨죽인 채 살며시 찾아들고 있는 우리 배 선수 오른쪽에 환한 나트륨 Flooding Light의 불빛을 밝힌 채 머무르고 있는 배가 일차 접근 목표이다.
열심히 접근할 주위를 항해계기로 살피고 있던 2 항사가 반가운 배 이름 하나를 들먹이며 말을 걸어온다.
-선장님 오션 마스터라는 배가 정박하고 있는데요.
-그래? 오션 마스터라면 옛날 내가 신조선으로 인수했던 배 이름하고 같은데……
-선적은 파나마인데요.
-그렇다면 맞을 것 같구먼
내가 인수할 당시 그 배는 편의치적을 택해서 파나마를 선적항으로 해서 신조된 배였다.
1995년 초봄 거제도 고현의 삼성중공업 드라이 도크에 이미 용골 거치로 시작하여 차근차근 모습을 갖추어 가고 있던 배에 이른바 신조선 인수 멤버로 찾아가 인연을 맺었던 오션 마스터호, 그 후 몇 년은 계속 책임 선장으로 승선하며 내 장년의 한 시절을 동고동락했던 배다.
그 배의 주갑판 하우스 통로에다 신조 인수를 같이했던 멤버들과 단체로 찍은 사진을 액자에 넣어 고정시켜 주며 이 사진이 계속 그 자리를 지키다가 명예로이 은퇴하는 배가 되었을 때 그 사진을 되돌려 받을 수 있었으면 하는 기원을 살짝 해봤던 기억이 새삼 떠오른다.
그러고 보니 그 배도 이미 사람으로 치면 퇴직할 나이가 가까이 다가온 상태인 만 15년을 넘어선 고령의 배가 되어있는 거다. 그러니 나이는 나만 먹은 게 아닌 모양이다.
어쨌거나 나는 이미 몇 년 전에 퇴직한 사람이지만 그래도 근래 재 취역하여 근무하고 있으니 행복한 상황을 즐기고 있는 중이라 볼 수 있겠지.
그런 때에 우리와는 멀리 떨어져 있는 지구의 반대편에서 만남 자체가 아주 반가운 인연이다. 신조선으로 태어나면서, 또 명명식을 할 때의 분주함도 함께 겪었던 오션 마스터호와 만났다는 사실에 새삼 질긴 인연의 끈을 헤아려 본다.
그러나 잠깐 그 인연의 고리를 살짝 접어주면서, 투묘 준비 상황을 최종 확인한다. 이미 선내 갑판, 기관의 전부서는 지정받은 투묘지에 도착하는 대로 자력으로 투묘하려고 -All Stand By- 준비를 끝내고 접근 중인 것이다.
하지만 속력이 계속 과하게 느껴지어 기관을 아예 정지시켜준 후 그야말로 타력으로 미끄러지듯 천천히 목표지점까지의 거리를 줄여보기로 한다.
드디어 선속을 줄이기 위해 준비하고 있던 기관 사용/정지의 첫 명령이 발령된 것이다.
-스톱 엔진. (선장의 발령)
-스톱 엔진. (당직사관의 명령 복창. 동시에 텔레그라프 신호로 기관실에 정지 명령을 내려줌)
-스톱 엔진 써. (당직사관이 전달해준 명령이 제대로 수행된 것을 확인하며 선장에게 보고하는 응답)
이렇듯이 상명하달이 내려지고 이어지며, 그에 따른 수행 응답으로 작업이 수행되어 투묘를 위한 모든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이다.
-데드 스로우 어스턴,
-데드 스로우 어스턴.
-데드 스로우 어스턴 써.
-스로우 어스턴,
-스로우 어스턴.
-스로우 어스턴 써.
-하프 어스턴,
-하프 어스턴.
-하프 어스턴 써.
-풀 어스턴,
-풀 어스턴.
-풀 어스턴 엔진 써.
이제 배는 약간의 툴툴거리는 진동을 가지고 안간힘을 다해 후진을 위한 엔진 출력의 최대 마력수 높이기를 시작한다.
희뿌연 어둠 속이지만 선미에서 발생되어 앞쪽으로 밀려가기 시작하는 스크루 커런트의 흰 거품 모습이 오른쪽 뱃전을 훑으며 흐른다.
-선수루/브리지, 엔진 후진 시작했음. 스탠바이 스타보드 앵카!(우현 묘 투묘 준비해주세요. 의 뜻)
-브리지/선수루, 우현 앵카 스탠바이 써!
-3 항사 지금 배의 속력이 얼마인가?
브리지에서 선장을 보좌하여 엔진 및 기타 조선 명령을 전달하고 있는 3 항사에게 이런 물음을 보내는 것은 현재 브리지 내 운항 사항을 전체적으로 알리고 스스로 확인하는 의미도 가진 물음인 것이다.
-예, 5노트로 떨어졌습니다.
3 항사가 즉시 계기판의 눈금을 확인하여 대답한다.
-하프 어스턴,
-하프 어스턴.
-하프 어스턴 써.
이윽고 후진 스크루 커런트가 5번 창을 넘어 계속 앞쪽으로 나갈 때쯤 엔진 파워를 반속으로 줄이며 다시 선속을 체크한다.
-선속, 전진 3노트입니다.
-알았어. 계속 속력이 떨어지고 있지?
-예, 선속 2노트입니다.
이제 투묘지에 들어섰고 적당한 장력도 생길 수 있는 곳에 도착했음을 감지하며 투묘 지시를 내려준다.
-선수루/브리지! 렛 고 스타보드 앵카.
-브리지/훡슬(선수루) 렛 고 스타보드 앵카! 일항사의 우현 묘 투묘를 위한 마지막 명령을 수령했음을 알려 주는
복창의 목소리를 들으며
-3 항사! 스톱 엔진! 기관정지의 명령을 내려준다.
-스톱 엔진! 3 항사가 복창하며 텔레그라프를 정지 위치에 놓아주는데.
선수루 쪽에서 촤르르! 하는 앵카 체인이 풀려 나가는 소리와 함께 선수미 방향으로 약간의 출렁이는 느낌이 선체를 통해 전해져 온다.
즉시 시간을 체크한다. 이 시간이 본선의 금 항차 리처드 베이에 도착한 공식 시간으로 되는 것이다.
풀려 나간 닻의 방향을 향해 선수가 고정될 때까지 몇 차례 더 선수부와 체인 방향에 대한 보고가 오고 간 후 이제 닻에 미친 장력이 일정하게 되었음을 보고 받는다.
즉시 선수루의 당직자들에게 수소를 치하해 주며 해산하도록 지시하며 기관의 사용도 끝이 났음을 알려주도록 3 항사에게 지시한다.
-휘니쉬 드 위드 엔진 써!
하며 3 항사가 텔레그라프의 손잡이를 몇 번 왕복시켜 엔진 사용 완료를 기관실에 알려준다.
잠시 후 기관실로부터 기관사용이 끝났음을 알게 하는 에어를 불어내는 소리가 들려오며 기관실의 스탠바이도 끝이 났다. 주기관은 꺼지고 발전기 소리만이 남은 한결 조용해진 선내가 되었다.
적하 지를 찾아오기 위해 쉼 없이 달려온 지난 20여 일이 넘은 항해가 이제 무사히 완료된 것이다. 이렇게 이룬 결과가 오늘따라 흐뭇한 마음을 부추기어 집으로 보낼 편지를 쓰게 한다. 어쩐 일인지...
<리처드 베이로 접근을 시작했습니다. 음력 16일의 환한 달빛 이건만 뿌연 장막 속에 가둬주려고 심술부리는 옅은 안개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청명한 달빛이 좀 가려지긴 했지만 그래도 보름 무렵의 달빛은 어둠을 밀어 내주고 있어 찾아 들어가는 투묘지 부근에 먼저 와서 대기 중인 배들의 모습은 그들이 켜준 환한 불빛과 함께 그런대로 잘 보이고 있습니다.
여섯 척의 배들이 선착하여 적당한 간격을 두고 투묘한 가운데 속으로 우리 배도 한자리 차지하려고 파고들다 보니 제일 먼저 가까워져야 할 배부터 살피게 되었는데, 마침 그 배가 당신도 알고 있는-아니 아는 정도가 아니라 당신도 동승하여 태평양을 건넜던- 오션 마스터호 였답니다.
그러고 보니 1995년도 벚꽃이 피어날 무렵.
그 배 오션 마스터호의 신조 인수 멤버로 참여하여, 거제 고현 삼성 신조 독으로 아침에 출근했다가 저녁이면 퇴근하여 당신과 함께 했던 마치 짧은 신혼 때 보다도 더한 달콤함을 풍겨주든 거제에서의 추억의 되새김이 슬금슬금 아련함을 펼쳐주는군요.
갑판을 환하게 주황색으로 밝히고 있는 나트륨 등의 불빛으로 인해 배 전체가 따뜻하게 느껴지는 그 배의 옆을 엔진을 정지시킨 채 타력으로 지나치어 닻을 내릴 자리로 찾아 들어갔습니다.
이윽고 원했던 자리에 도착할 무렵 엔진에 전속 후진 명령을 내려 배가 덜덜거리는 진동과 어울려 전진 속력을 줄여주다가 어느새 약간의 후진 속력을 만들어 줄 때에 닻을 내려주었습니다.
작년도 이스라엘 아쉬케론에 기항했을 때 이 배보다 일 년 먼저인 1994년도 초봄에 역시 삼성 조선소에서 신조선 멤버로 참여하여 승선했던 오션 뱅가드호를 만났었고 이번에는 그들의 신조 때와 같은 일 년 터울의 주기로 오션 마스터호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이 보통 인연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마치 머나먼 외국에 시집이라도 보내어 다시는 만남을 기약할 수 없었던 딸자식들을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만나게 되는 심정이 이런 것일까? 싶은 감회가 새벽의 닻을 내려주는 촤르르! 하는 소리와 함께 내 뇌리를 파고들었답니다. 그러나 생각을 그렇게 하다 보니 문득 과년한 딸자식은 생각할 수도 없이 나이들은 아들자식만 셋을 둔 우리라는 현실이 지금껏 했던 이야기를 우스워지게 만드네요. 그냥 이야기는 여기까지 해두고 이제는 자야 할 것 같습니다.
ps: 아침이 되어 그 배와 이야기라도 해 볼까 생각하며 브리지에 올라가니 그 배는 접안 한다고 움직이기를 시작하더군요. 우리보다 이틀 먼저 도착하여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우리가 하루라도 빨리 부두에 들어가게 된다면 같은 부두에 나란히 다만 몇 시간이라도 있을 수 있겠지만 지금 그런 상황을 바라기에는 좀 무리가 있을 것 같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