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묵히 걸어간 삶의 끝에서.

'스토너'

by 이기장


해외 문학은 제게 늘 '넘기 힘든 문턱'과 같았습니다. 특유의 번역투 문체는 서사 속으로 깊이 몰입하는 것을 방해하곤 했고, 때로는 우리 정서와는 동떨어진 상황 설정이나 낯선 감정선 때문에 책장을 덮어버린 적도 많았습니다. 이번에 집어 든 『스토너』 역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여느 서구 문학처럼 이질감이 느껴졌고, 굳이 내가 알지 못하는 시대의 고단한 삶을 들여다봐야 하는지 의구심이 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윌리엄 스토너라는 한 남자의 일대기를 끝까지 따라가다 보니, 제 안에 강렬한 삶의 실존적인 흔적이 남게 되었습니다.


'죽음으로 향하는 고독한 보폭'

이 소설을 읽으며 가장 먼저 깨달은 것은, 인생이란 결국 죽음이라는 명확한 종착지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는 과정이라는 점이었습니다. 스토너의 삶은 화려하지 않습니다. 흙을 일구던 부모의 곁을 떠나 학문의 세계로 들어왔지만, 그곳에서도 그는 대단한 영웅이 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무미건조해 보이는 발걸음은 역설적으로 삶의 가장 정직한 속성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누구나 태어나는 순간부터 소멸을 향해 걷기 시작하며, 그 길 위에서 만나는 고통과 인내는 피할 수 없는 동반자임을 스토너는 묵묵히 증명해 보입니다.


'모든 것이 흩어지는 생의 끝자락'

인생의 종착역에 다다랐을 때, 우리가 그토록 집착했던 성취나 명예, 부가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를 스토너의 마지막 순간을 통해 통찰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교수로서 대단한 명성을 쌓지도 못했고, 정치적인 싸움에서 승리하지도 않았습니다. 죽음을 앞둔 그에게 남은 것은 손때 묻은 책 한 권뿐이었습니다. 세속적인 잣대로 보면 그의 인생은 실패에 가까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대부분의 이들이 좇는 사회적 가치가 조금도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며, 저는 스스로 질문하게 되었습니다. '인생의 끝에서 나를 온전히 지탱해 줄 가치는 과연 무엇인가'라고 말입니다.


'결국, 우리가 추구해야 할 단 하나의 가치 '사랑''

그 질문에 대한 답은 결국 '사랑'으로 귀결되었습니다. 여기서 사랑은 단순히 남녀 간의 치기 어린 감정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스토너가 지독하게 매달렸던 문학에 대한 열정, 딸에 대한 애틋함, 그리고 뒤늦게 찾아온 운명적인 교감까지, 그 모든 것이 사랑의 형태였습니다.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도 그를 숨 쉬게 했던 것은 결국 무언가를, 혹은 누군가를 깊이 아끼고 몰입했던 마음이었습니다. 삶이 결국 허무로 귀결될지라도, 그 과정을 빛나게 하는 유일한 에너지는 사랑뿐이라는 사실을 스토너의 외로운 투쟁을 통해 절감했습니다.


'한 아버지로서 느낀 분노와 슬픔'

한편으로, 스토너라는 인간에 대해 깊은 연민과 안타까움을 지우기 어려웠습니다. 특히 그의 배우자 이디스와의 관계는 책을 읽는 내내 고통스러웠습니다. 누구나 인생에서 잘못된 선택을 할 수 있지만, 정신적 불안을 안고 있는 배우자로 인해 스토너의 삶이 갉아먹히는 과정은 보는 이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습니다.

무엇보다 저를 분노케 했던 대목은 딸 그레이스를 대하는 이디스의 행태였습니다. 딸아이를 키우고 있는 아빠의 입장에서, 아이의 정서와 삶이 망가져 가는 장면은 차마 눈을 뜨고 보기 힘들 만큼 가슴 아팠습니다. 아이는 부모의 사랑을 온전히 누려야 할 권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토너가 가진 한계와 아내의 뒤틀린 욕망 속에서 딸이 소모되는 모습은 단순한 소설 속 설정을 넘어 제게 깊은 슬픔과 분노로 다가왔습니다.


'평범한 생애가 주는 비범한 성찰'

대부분의 소설이 주인공의 화려한 등장과 극적인 갈등 해결, 그리고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동화 같은 결말을 지향한다면, 『스토너』는 철저히 그 반대편에 서 있습니다. 이 책은 한 사람의 탄생부터 죽음까지를 아주 담담하게 그려내며, '보통의 인생'이 얼마나 무겁고도 숭고한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책장을 덮으며 저는 제 인생의 끝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스토너처럼 저 역시 언젠가는 죽음 앞에 서게 될 것이고, 그때 제가 손에 쥐고 있을 것은 제가 이룬 업적이 아니라 제가 진심으로 사랑했던 기억들일 것입니다. 비록 해외 문학이라는 생소한 틀 안에 있었지만, 그 속에 담긴 보편적인 인간의 고뇌는 제 삶을 진지하게 되돌아보게 하는 거울이 되어주었습니다. 스토너의 삶은 고달팠으나, 그의 묵묵한 걸음은 이제 제게 삶을 어떻게 견디고 사랑해야 하는지에 대한 조용한 이정표로 남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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