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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장 Dec 23. 2023

"차 한 잔 할까요?"

출처 : 커피타임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조종 교육을 모두 마치고, 발령받은 회사에 처음으로 출근하던 날. 가장 가까운 기수 선배를 따라 여러 사무실을 돌며 선배 조종사분들께 인사를 드리던 때였다. 사무실마다 문을 빼꼼히 열고 들어가서 "새로 온 후배 조종사입니다. 인사드리려고 찾아뵀습니다."라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매번 "어~ 그래요. 차 한 잔 합시다!"라는 말이 이어졌다. 그날 마신 차만 열 잔이 넘었을 것이다. 



  당시에는 모든 게 낯설기만 할 때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이 사람이 누구인지, 여기가 어느 사무실인지 등등 무엇 하나 기억에 제대로 담지 못한 채, 그저 선배 조종사들이 건네주는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질문을 주고받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니지, 정확히 표현하자면 '끊임없이 퍼부어대는 질문 세례를 견디느라 진땀을 뺐다'라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차츰 조종사 생활이 익숙해질 무렵,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차 마시는 것도 일인가?'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출근 시간이 조금 지날 무렵이면 동료들이 하나둘씩 티 테이블로 모여들면서 자연스레 커피포트에 물이 끓기 시작했다. 그런데 또 조금 시간이 지나면 한 두 명씩 자리를 뜨고, 언제 그랬냐는 듯 말끔한 테이블만 덩그러니 남겨지는...



  출근 직후에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일과 시간 중에는 말할 것도 없고, 점심 먹기 전, 점심 먹은 후, 오후 일과를 시작하기 전 등등 시도 때도 없이 사람들이 모였다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심지어 본인 사무실이 아닌 다른 사무실을 오가며 차를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는 데 거리낌이 없는 분위기였다. 



  외향적인 '척'하는 내향형 인간인 나로서는 이러한 분위기가 달갑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괜한 잡담으로 시간을 낭비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각자 부족한 비행 연구 열심히 하고, 주어진 임무 준비만 잘하면 되지,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아서 이리 모여 앉아 시간을 죽이는 것인가'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어쩔 수 없는 막내 조종사였다. 그렇게 적당히 차도 마시고, 잡담도 하다 보니 어느덧 시간이 흘러 나도 기장이 되었다. 기장이 되어 보니 티 테이블이 전과 다르게 보이는 것이 아닌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티 테이블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 있는 모습이 소위 말해, '노가리나 까는' 것 같아 보였는데, 기장이 되어 보니 그게 다가 아니었던 것이다.



  안전 비행을 위해서는 뛰어난 조종 기술을 익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우선되어야 하는 게 있다. 바로 CRM(Crew Resource Management)이다. CRM이란, "조종실 내 승무원 간 협력의 필요성을 이해하고, 승무원들이 지니고 있는 능력의 한계, 조직의 성과를 향상시키기 위한 의사소통. 의사결정, 갈등 관리 및 인적 오류 관리에 대한 지식과 기술을 교육하여 항공 안전과 직무 성과를 향상시키려는 것" (출처 : 실험심리학용어사전, 2008., 곽호완, 박창호, 이태연, 김문수, 진영선) 이다. 쉽게 말해 CRM은 '조종사 간의 원활한 의사소통'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인 경우, 헬리콥터는 2명의 조종사를 최소 승무원으로 규정하고 있다. 적어도 두 명의 조종사가 함께 비행을 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두 명의 조종사가 항상 한 마음 한 뜻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으면 좋겠지만, 어디 그게 쉬운 일인가. 



  비행 중인 헬리콥터에서는 엄청난 소음이 뿜어져 나온다. 이 소음은 단순히 조종사의 고막을 울리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긴장을 유발하며 온몸의 감각을 둔하게 만든다. 백색소음이 인간의 집중력을 향상시킨다고 하는데, 흑색소음은 끊임없이 집중력을 흐트러트린다. 헬리콥터에 시동을 거는 그 순간부터 조종석에는 흑색소음이 가득 찬다. 조종사는 비행하는 내내 이 흑색소음을 이겨내야만 한다.



  문제는, 흑색소음이 가득한 조종석에서 두 조종사의 합(合)이 잘 맞아야 안전하게 임무를 마칠 수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척하면 척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척하면 척'하기 위해서는? 평소에 부단히 교류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서로가 서로를 잘 모르는데 어떻게 척하면 척할 수 있겠는가. 



  가장 쉽고 간편한 교류 방법이 바로 '대화'이고, 차를 마신다는 것은 곧 대화를 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대화를 통해 친밀함을 쌓을 수 있다. 위계질서가 비교적 엄격한 조종사 세계에서 후배 조종사는 선배 조종사를 무척 어려워할 수밖에 없다. 티 타임은 엄격한 위계질서에 윤활유 역할을 하는 것이다.



  평소 교류가 전혀 없는 두 조종사가 비행을 한다고 가정해 보자.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보통 기장은 선배 조종사가, 부기장은 후배 조종사가 맡는다) 부기장은 기장의 성향이나 성격, 비행 스타일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쉽사리 말을 건네지 못할 것이다. 이때 기장의 성격이 과묵하다거나 '꼰대' 기질의 성향이 다분하다면, 더더욱 부기장은 위축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위축된 부기장이 비행 중 적절한 조언을 건넬 수 있을까? 이 조종석에서 바람직한 CRM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아닐 것 같다.



  차 한 잔은 결국 안전비행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은 경직되어 있는 관계를 부드럽게 만드는 시간일 뿐만 아니라,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는 시간이며, 서로가 서로의 넘지 말아야 할 '선(Line)'이 어디인지 알아갈 수 있는 시간인 것이다.



  『두려움 없는 조직』이라는 책에서는 "침묵이 조직의 성과를 갉아먹는다"라고 말한다. 침묵이 성과뿐만 아니라, '생명'을 갉아먹을 수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겠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도 커피 포트에 물을 올려놓는다. 


  "차 한 잔 하실까요 여러분?"




[책 속 한 대목] ‘조종석의 침묵’ 최악의 항공참사 일으켰다 < 북앤북 < SEOUL PRESS < 기사본문 - 이코노믹리뷰 (econovil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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