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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장 Feb 13. 2024

설날은 처음이래요 ~ (34)




출처 : 출처 : 설날 풍경 [화보] - 경향신문 (khan.co.kr)



  내비게이션 화면 속 도로는 연신 붉은색 빛을 뿜어댔다. 새로고침 버튼을 반복해서 눌러보아도, 경로 설정을 달리해보아도 변하는 건 없었다. 이리 가나 저리 가나 길이 막히는 건 매한가지일 뿐.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내비게이션이 알려주는 예상 도착시간은 점점 늦어져 갔다. 마치 우리가 타고 있는 차가 목적지의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것처럼.



  육아 휴직을 하기 전까지만 해도 나에게 명절은 먼 나라 이야기였다. 평일, 휴일 구분 없이 돌아오는 대기 근무 때문에, 어쩌다 정말 운이 좋게 근무를 피하는 경우에만 명절을 즐길 수 있었다. 물론 그것도 긴 연휴 중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지만.



  성인이 되고 경제적인 독립을 하면서부터 명절에 들뜨던 마음이 점차 식어갔다. 날이 점점 따뜻해질 무렵이면 설을 기다렸고, 날이 점점 쌀쌀해질 무렵이면 추석을 기다렸다. 물론, 그 마음은 풍성하고 따뜻한 가족의 온기를 기대하는 마음이 아닌, 하루라도 더 늘어져 쉬고 싶은 날을 기대하는 마음이었다.



  그러다 결혼을 하였고 아빠가 되었다. 아빠가 되면서 명절을 대하는 나의 태도는 완전히 달라졌다. 아빠가 되기 전이었다면 하루라도 더 집구석에 있어보려 애를 썼겠지만, 지금은 바리바리 짐을 싸 들고 먼 길을 떠나는 데 주저함이 없어졌다. 우리 아가를 격하게 반겨주는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많은 친척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에.



  친가를 가도, 외가를 가도, 우리 아가는 늘 그 자리의 주인공이 된다. 아기가 귀한 시대라고는 하지만, '하트 뿅뿅한 눈'으로 내 새끼를 바라봐 주는 이들을 만나는 일은 쉬이 경험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엄마·아빠가 아닌 다른 많은 이들의 무조건적인 사랑에 흠뻑 젖을 수 있는 시간, 그 시간을 아가에게 선물해 주고 싶은 마음이 아마 모든 엄마·아빠의 마음이 아닐까? 



  아가도 엄마·아빠의 마음을 아는지, 오고 가는 길 내내 찡얼 거림이 없었다. 오도 가도 못하는 도로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느라 엄마, 아빠는 초주검이 되었지만, 다행히 아가는 카시트에 낑겨 있는 내내 '딥슬림 & 싱글벙글'을 반복하며 엄마, 아빠의 걱정을 덜어주었다. 혹시... 세뱃돈 받을 생각에 들떠서 그런 거니?



  주인공은 제일 마지막에 등장한다고 했던가. 아가와 엄마·아빠는 도착하기로 정한 시간보다 1시간이나 늦게 도착했다. 집안의 제일 막내인 아가가 가장 늦게 도착하다니. 머쓱함을 느끼며 조심스레 현관문을 열고 들어섰다.



  빼꼼히 문을 열고 들어서자 앉아있던 모든 친척들이 일제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너 나 할 것 없이 함박웃음으로 아가를 반겨주었다. 아가는 낯선 풍경에 긴장한 듯 '음마 음마'를 외치며 엄마 품을 파고들었지만, 금세 자신이 자리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인지한 듯 하찮은 윗니 아랫니를 보이며 받은 사랑에 보답하고자 했다.



  세배도 잊은 채 서둘러 아가의 밥을 챙기며 식사를 하려던 순간, 갑자기 진풍경이 펼쳐졌다. 친척들이 하나둘씩 아가 앞에 줄을 서서 세뱃돈이 든 봉투를 아가에게 건네는 것이 아닌가. "새해 복 많이 받으렴 아가야"라는 세배?와 함께. 그 순간, "아가는 세배도 받고 세뱃돈도 받는가벼?"라는 누군가의 농담에 모두가 한바탕 웃음을 터드렸다. 



  최근에 아내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SNS에서 보았는데, 아기를 사랑한다는 것은 기억을 잃어버린 이를 사랑하는 것이래"라고. 우리 아가는 지금 보내는 하루하루를, 순간순간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저 공간에 존재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온 가족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반짝반짝 빛났던 첫 설날의 시간도.


  하지만 언젠가는 결국 알게 되겠지. 엄마·아빠처럼 소중한 보물을 품에 안게 되는 때를 만난다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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