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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장 Apr 23. 2024

인연의 끈 (43)

출처 : [도안/이미지] 우리 원과 친구들 그림 모음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우리의 인연은 우리가 고등학생이었던 약 20년 전의 과거로 한참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우리는 고등학교 2, 3학년을 같은 반 친구로 지냈는데, 신기하게도 매 학 년 나는 1학기 반장을, 그 친구는 2학기 반장을 맡으며 2년을 보냈다. 심지어 2년 동안 같은 선생님을 담임으로 두고 말이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우리는 그다지 비슷한 구석이 없었던 것 같다. 성격도, 취향도 달랐고, 관심사도 결코 비슷하다고 할 수 없었다. 예를 들면, 그 친구는 컴퓨터 게임을 좋아했다면 나는 밖에서 뛰어노는 걸 더 좋아했고, 그 친구가 어울리는 무리가 시끌벅적했다면, 내가 어울리는 무리는 수도 적고 조용조용했다고나 할까?



  하지만 당시에는 서로가 다르다는 것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아마 그 이유는 우리가 똑같은 짙은 남색의 교복을 입고, 1교시가 시작하는 8시 30분부터 야간 자율학습이 끝나는 밤 10시까지 같은 교실에서, 같은 선생님의 수업을 들으며, 같은 칠판을 향해 앉아, 같은 교과서의 책장을 넘기며, 같은 밥을 먹으면서 2년의 시간을 지냈기 때문일 것이었으리라 짐작해 본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함께 시간을 보내며 놀았던 기억이 떠오르지 않는다. 떠오르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없었던 것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말이다. 다만, 함께 공부했던 순간은 꽤 여러 장면이 기억 속에 남아있다. 2년 동안 꾸준히 야간 자율 학습 시간에 남아 공부를 했던 기억, 탐구영역의 선택 과목을 골라서 인터넷 강의를 공유했던 기억, 방학 때마다 집 근처 도서관에 자리를 잡고 함께 공부하며 대학입시를 준비했던 기억 등등.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우리의 삶의 궤적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나는 입시를 마무리 지으며 대학생이 되었고, 그 친구는 재수를 선택하며 수험생의 자리에 조금 더 머물게 되었기 때문이다. 드문드문 연락을 이어갔지만, 2년이라는 시간 동안 맺은 나와 친구의 인연의 끈은 그렇게 점점 가늘어져만 갔다.



  친구가 재수 생활을 마치고 교대로 진학하면서 학교생활, 진로 등 삶의 큼지막한 부분에 대한 우리의 접점은 더욱 줄어들게 되었다. 다행히 대학 생활 중 우리는 선·후배 ROTCian이 되었고, 대학 졸업 후에는 다시 1년 차이로 선·후배 해병 장교가 되어 또 다른 공통분모를 갖게 되었다. 국방의 의무 덕분에? 얇아져가기만 하던 인연의 끈은 다시 전처럼 굵어질 수 있었다. 



  함께 군 생활을 할 때는 '뭣' 같은 하루하루에 대한 짜증, 분노, 슬픔, 아픔을 나누느라 종종 연락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군 생활을 마친 후부터 나는 취업 준비에, 친구는 임용 준비에 시간을 쏟으며 각자의 '먹고사니즘'을 해결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서로의 안부를 물을 새도 없이 남은 20대의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렇게 다시 우리가 가진 인연의 끈은 그 굵기가 점점 가늘어져 가는 듯했다.



  치열한 20대를 보내고, 어느덧 30대 중반의 문턱을 넘어서며 우리는 남편이 되었고, 아빠가 되었다. 그리고 지난 주말, 고등학교 동창으로서가 아닌, 한 아이의 아빠로서 가장 소중하고 어여쁜 보물을 데리고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였다. 두 아빠 친구, 두 딸 친구가 함께 모여 보내는 시간이 얼마나 반짝이던지!



  두 아빠 친구는 두 딸 친구가 오손도손 노니는 광경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순한 두 딸 친구는 함께 맘마도 먹고, 응가도 하고, 장난감도 주고받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어린 아가들은 처음 보는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짜증 한 번 없이, 울음 한 번 없이, 있는 듯 없는 듯, 집 안 여기저기를 걷고 기어 다니며 시·공간을 공유했다. 두 아빠 친구의 입꼬리가 내려올 새도 없이 하루라는 시간은 훌쩍 흘러갔다.



  밖이 어둑어둑해질 때 무렵 아빠는 아빠의 친구와, 딸은 딸의 친구와 헤어짐의 인사를 나누었다. 친구를 떠나보내며 아빠라는 존재가 되면서, 자녀라는 존재를 얻음으로써, 늘어진 치즈처럼 얇아졌던 친구와의 인연의 끈이 다시금 굵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문득 이 두 아이가 내년, 내후년, 더 먼 미래까지 그 인연을 이어간다면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졌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이 팍팍하기만 한 것이 인생이라지만, 아득한 미래를 그려보며 미소 지을 수 있는 것이 또한 인생이 아닐까'라고 생각하면서. 


  오늘도 이 작은 생명을 어루만지며 인생의 진한 맛을 느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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