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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장 May 02. 2024

지금은 '딴 짓' 중

출처 : MBC, '무한도전'



  하루는 24시간이다. 부자도 가난한 자도, 서울에 살든 부산에 살든, 나이가 많든 적든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하루는 24시간으로 동일하다. 그렇지만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24시간 전부를 사용하는 사람은 아주 소수일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회인으로서 조직의 구성원이 되고, 결혼을 하여 부부가 되고, 자녀를 낳고 부모가 되면서 감당해야 하는 역할이 점점 늘어나기 때문이다. 물론, 해내야 하는 역할이 늘어나더라도 하루는 24시간으로 변함이 없다. 자연스레 하루 24시간에서 온전한 '나'의 몫은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학창 시절, "공부에도 때가 있다"라는 말을 참 많이 들었다. 물론, 깊이 공감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학생의 본분은 공부라지만, 본분인 공부만 빼면 모든 것이 재밌을 때가 학창 시절 아니겠는가. 하지만 학교를 다녔던 기간만큼 사회생활을 해보니 이제는 알 것 같다. '배움'에는 끝이 없지만, '공부'에는 그에 맞는 때가 분명히 있다는 사실을. 다른 역할에 대한 고민과 걱정, 부담에서 벗어나 24시간을 온전히 공부에 집중할 수 있는 때가 바로 '학생'의 신분을 가지고 있을 때라는 사실을 말이다.



  졸업을 하고, 취업을 하고, 결혼을 하고, 자녀를 얻어 아빠가 된 지금, 나의 본분은 더 이상 공부가 아니다. 육아휴직을 했으니 '당분간'은 직장 일도 나의 본분에서 제외된 상태이다. 다른 아빠들은 직장 일도 하고 육아도 하고 가사도 하느라 하루 24시간으로는 부족하다고 하던데, 다행히 나는 아내 덕분에 직장 일이라는 짐을 덜었다. 물론 육아라는 짐을 더욱 크게 짊어지게 되었지만...



  휴직을 하면 시간이 많을 줄 알았다. 하루 3분의 1 이상의 시간을 쏟는 직장에서 벗어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가를 돌보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까지만 해도 나의 하루는 여유롭게 흘러갔다. 본분은 육아였지만, 본분에 쏟아야 할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은 듯 보였다. 오히려 본분이 아니기 때문에 재미있는 딴짓들로 하루의 대부분의 시간을 열심히 채워나갔다. 하지만 아가가 점점 자라면서 내가 아주 큰 착각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의 일터가 직장에서 집으로 바뀐 것뿐이라는 사실을...



  아가는 커가면서 점점 낮잠 시간이 줄어들었고, 그에 비례하여 나의 본분을 다해야 하는 시간은 점점 늘어났다. 시험 기간이면 딴짓을 하고 싶은 마음이 더욱 커졌던 것처럼, 육아에 투입되는 절대시간이 늘어날수록 육아가 아닌 다른 일에 쏟는 나의 열정을 커져만 갔다. 하지만 본분을 망각하고 살 나이는 한참 전에 지났으니, 요령껏 딴짓할 시간을 확보하는 수밖에...



  다행히 아내의 배려로 저녁 8시면 '육.퇴.'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 아내가 퇴근하여 아가를 재우는 동안, 부리나케 세탁기를 돌리고 설거지를 한 뒤, 어지럽게 놓여있는 아가의 장난감과 책들을 치운다. 분유 포트에 물을 채워 끓이고 세탁을 마친 세탁물들을 꺼내어 건조대에 널면 딴짓 준비 끝! '자 그럼 이제 시작해 볼까?'



  저녁 8시 육퇴 이후, (공부 말고는 모든 게 재밌었던 학창 시절처럼) 육아가 아닌 것들로 자유 시간의 재미를 더하기 시작했다. 잠자리에 들어야 하는 때까지 남은 시간은 대략 4시간 정도! 결코 긴 시간이 아니었기 때문에 하고 싶은 모든 것을 다 해낼 수는 없었다.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하고 싶은 일들을 요일별로 조금씩 나누어 '발가락이라도' 담가놓아 보자는 것! 덕분에 몇 개월째 운동, 영어 공부, 글쓰기, 독서를 꾸준히 지속하고 있다. 비록 그 일들의 수준은 '발가락 길이' 정도의 깊이밖에 되지 않지만...



  이따금씩 나의 하루는 24시간이 아니라 4시간인 것 같아 씁쓸함을 느낀다. 이제 좀 탄력이 붙었다 싶으면 어느새 시계는 자정을 가리키고, 지금 잠들지 않으면 감당하지 못할 내일의 육아 걱정 때문에 이내 하고 있는 일을 접는다. 하지만 직장 일도, 가사도, 육아도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는 24시간이 주어진다고 상상해 보면, 결코 지금처럼 부지런히 4시간을 채우지 못할 것이라 짐작해 본다. 딴짓은 하루 종일 하면 재미없을 테니까?



  오늘은 육퇴 후, 나 스스로 정한 글 작성 마감기한을 지키기 위해 노트북을 열어 키보드를 두드렸다.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는데 노트북 화면 속 커서는 한참 동안 한자리에서만 깜빡거렸다. 오늘처럼 글이 써지지 않는 날이면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러고 앉아 있나'라고 생각하며 스트레스를 받지만, '이렇게 딴짓이라도 하고 있으니 육아를, 본분을 지속할 힘을 얻는 게 아니겠는가'라고 생각하며 위안을 얻는다.



  벌써 자야 할 시간이다. 조금만 더 끄적여이다 잘까 생각했지만 이내 노트북을 덮었다. 이대로 하루를 마무리하기에는 조금 아쉽지만 괜찮다. 원래 딴짓은 잠깐일 때 더욱 재밌는 것 아니겠는가?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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