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시절, 매 학년 초가 되면 어김없이 '나의 좌우명'을 제출해야 하는 숙제가 주어졌다. 뭘 모르는 저학년 때만 하더라도, 부모님을 졸라 그럴듯한 문구를 여러 개 찾아놓고 한참을 고민하곤 했었다. 마치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는 국호를 정하는 것 같은 신중한 마음으로 말이다.
하지만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고, 점점 머리가 커지면서 언제부터인가 나의 좌우명은 변함없이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자"로 굳어졌다. 그 시작점의 순간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기억하기 쉽고 널리 쓰이는 말이면서도 뭔가 그럴듯함?이 묻어나는 말이었기 때문이지 않았나 싶다.
성실함과 꾸준함을 강조하는 좌우명은 내 인생 곳곳에서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고, 그 덕분에 나는 꽤나 착실하고 모범적인 학창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언제나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즉시 그날의 숙제를 빠르게 해치웠고, 챙겨가야 하는 준비물이라도 있으면 온 집안을 헤집어 놓으며 부산을 떨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는 것이 목에 가시가 박힌 것처럼 불편했던 게 아니었나 싶다.
무슨 일이든 빨리빨리 해결해 버리려는 급한 성격 덕분에 방학 숙제를 한 번도 밀린 적이 없었다. 빨리 끝내버릴 수 있는 것들, 예를 들면 한자 쓰기나 과학실험 같은 숙제는 방학이 시작된 지 일주일이 지나기도 전에 숙제 리스트에서 지워지기 일쑤였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게 다였다. 숙제를 다 마친 후에도 재미난 경험, 의미 있는 시간은 없었다. 본격적으로 알찬? '허송세월'이 시작되는 지점이었을 뿐...
꽤 오래전 가수 '박진영'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접했던 적이 있다. 그도 나처럼 방학이 되면 방학 숙제를 최대한 빨리 해치워버렸다고 한다. 그는 방학 숙제를 빨리 해치워버린 이유로 '자유'롭고 싶었기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나와 다른 점이 있었다. 그는 단순히 나처럼 '해야만 하는 일'에서 벗어나려고만 했던 것이 아니라, 해야만 하는 일을 끝내놓고 '하고 싶은 일'에 몰두하려 했다는 점이었다.
박진영의 이야기를 처음 접했을 때만 해도, 그도 나처럼 마냥 부지런한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던 것 같다. 그의 좌우명도 아마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자"이지 않을까 생각하며 흘려 넘겼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않는 것'이 아니라 '왜 미루지 않아야 하는지'이며, '오늘 일'과 '내일 일'을 따질 게 아니라 '정말 내가 원하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했어야 하는 것이었는데 말이다.
"제 버릇 개 못 준다"라고, 나는 여전히 지금도 오늘 해야 할 일에 목을 매고 있고, 혹여 끝내지 못한 일이라도 있으면 'To do list'를 보며 울상을 짓곤 한다. '오늘 이거 다 했어야 하는데...'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나를 아주 잘 아는 아내는 나를 보며 말한다. "그거 오늘 못한다고 뭐 잘 못 돼? 내일 해 내일!" 나도 잘 알고 있다.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않으려고 노력한 덕분에 지금의 아내를 만나, 귀여운 아가를 낳고 오손도손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어리석음을 아주 나쁘게만 볼 것은 아니라는 사실!
하지만 우리 아가는 쩨쩨한 아빠를 닮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늘 할 일, 내일 할 일 같은 자잘한 것에 연연하지 않고, 내년, 후년, 더 먼 미래를 위해 지금 당장 더 소중하게 여겨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는 지혜를 갖기를 소망해 본다.
그런 의미에서 아빠도 오늘만큼은 'To do list'의 목록을 좀 남겨두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니까... 거실 바닥은 내일 닦아도 되겠지?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