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허름한 술집에서 ‘쉼표’를 연주하다’

한경록의 캡틴락 항해일지> 한겨레 연재 칼럼

by 한경록


‘허름한 술집에서 ‘쉼표’를 연주하다’



언제부터인가 ‘여유’라는 것이 없어졌다. 한시라도 멍때리게 되면 24개의 퍼즐 중 한 조각이 없어진 것처럼 불안하게 느껴진다. 나이를 먹을수록 시간이라는 수챗구멍 속으로 더 빨리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다.

텔레비전을 켜면 주식은 내 혈당처럼 떨어지고, 관세는 혈압처럼 치솟는다.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 팽이처럼 요동치는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때로는 어려운 상황을 묵묵히 견뎌내야 할 때도 있다. 낭만과 웃음이 필요한 시기이다.

“삶은 산처럼 무거우나 죽음은 깃털처럼 가볍다.”라는 문구가 떠오른다. 이 말을 “출근은 산처럼 무거우나 퇴근은 깃털처럼 가볍다.”라고 바꿔서 생각하니 피식 웃음이 나온다. 우리에게는 퇴근 후, 지친 어깨를 토닥여줄 위로의 공간이 필요하다. 내게는 그것이 동네의 ‘허름한 술집’이었다. 누군가에겐 집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겐 동네 카페나 헬스장, 또는 도서관일 수도 있다. 탁구장이나 수영장, 달리기를 할 수 있는 운동장, 한강공원 등 어디라도 좋다. 그림, 악기 또는 외국어 교습을 받거나, 친구들과 밴드 동호회에 가입하는 것도 좋다. 어느 공간이든 휴식 같은 곳이 필요하다.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허름한 술집’이 필요한 것이다.

나에게 ‘허름한 술집’은 일종의 노스탤지어 같은 공간이다. 자연스레 세월이 묻어난 낡은 의자와 테이블, 벽에 붙어있는 색이 바랜 사진과 포스터들, 오래된 스피커에서 느릿느릿 흘러나오는 추억의 노래들이 고단한 하루에 지친 어깨를 토닥여준다. 여기엔 레트로를 표방한 여느 술집에서는 느낄 수 없는 따뜻한 웃음소리와 온기가 배어있다. 가끔씩 외로움과 헛헛한 적막감을 벗어나, 이곳에 앉아 있으면 동네 친구들이 모여든다. 약속을 잡고 만날 때는 시간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이 느껴질 때가 있는데, 우연히 만난 동네 친구들은 길거리에서 오백 원짜리 동전을 주운 것처럼 반갑기 그지 없다.

고단한 일상에 지쳐있을 때, 사랑하는 연인이 담배 연기처럼 내 곁을 떠나갔을 때, 면접에서 떨어졌을 때, 다이어트를 결심했을 때, 고대했던 청약 당첨 소식처럼, 때로는 반가운 불청객처럼 동네 친구들이 모여든다. 친구들과 실없는 농담들이 하얀 팝콘처럼 빵빵 터지고, 다이어트는 물 건너갔다고 너스레를 떨기도 하고, 흘러간 유치한 사랑 노래에 귀를 기울이며 함께 추억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편한 옷차림에, 산책하는 마음으로 잠시 들른 허름한 술집에서 잠시라도 고단한 일상을 잊을 수 있다.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삶의 무게를 잠시 벗어나 재충전의 시간이 되기도 한다. ‘마음 놓고 수다 떨 친구 한 명만 있으면 병원 갈 일 없어진다’고 엄마가 그랬다. 가끔씩 여기서 동네 친구들과 눈물 핑 돌 때까지 웃으며 수다를 떨다 보면 주머니는 가벼워질지언정 무거웠던 마음도 한결 가벼워질 것이다.

한 사람을 만나는 것은 한 권의 책을 읽는 것 같다. 허름한 술집에 오면 심야 도서관에 온 것 같다. 각자의 숨겨진 야사를 읽는 것처럼 흥미롭다. 세상이 그렇듯 빛과 그림자가 존재한다. 그렇게 흥겹고 신나는 술자리가 끝나고 손님이 다 빠져나간 술집을 몽롱하니 바라보고 있노라면 왠지 쓸쓸한 기분이 몰려온다. 그 많던 친구들과 웃음소리는 어디로 사라진 걸까? 축제가 끝나고 허무한 느낌이랄까?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달빛마저 청승맞다. 하지만 괜찮다고 중얼거려본다. 반복되는 일상, 괜스레 바쁜 아침 정글 같은 출근길을 헤쳐나가고 도파민 터지는 짜릿한 직장 생활의 허들을 넘고 나면 우리에게 퇴근이라는 달콤한 선물이 쥐어질 것이다. 그러면 또 허름한 술집에 불이 켜질 것이고, 동네 친구들이 모여들 것이다. 그렇게 고와 락, 삶은 윤회한다.


그 윤회의 변곡점에서 우리는 쉼이 필요하다. 음악 연주 중 쉼표가 나올 때, 예전에는 잠시 멈추기만 했었는데, 이제는 깨달았다. 쉼표도 연주해야 한다는 것을. 인생이라는 악보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우리가 살아갈 인생이라는 악보에서 쉼표를 지켜주지 않는다면, 아름다운 음악이 될 수 없다. 음표가 많다고, 연주를 빨리한다고 해서 좋은 음악은 아니다. 음악과 인생은 경주가 아니다. 각자만의 템포가 있고 리듬이 있다. 잠시 멈춰서서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명상하듯 휴식을 취하며 한 발짝 떨어져서 자신을 바라 보고 알아차리자. 내가 외로운 건지, 배고픈 건지 알아차려야 한다. 우울한 건지 잠이 모자란 건지 곰곰이 생각해 보자. 생각보다 지금 내가 처한 문제들이 별것 아닐 수 있다. 허름한 술집에서 동네 친구들과 한바탕 웃고 풀어버리면, 인생 그렇게 심각한 게 아닐 수도 있다. 가볍게 살다 가자.



4/7(월) 한겨레 신문 지면과 웹 오피니언 면에

<한경록의 캡틴락 항해일지>

‘허름한 술집에서 ‘쉼표’를 연주하다’ 편이

이상면의 삽화와 함께 실렸습니다.


#크라잉넛 #캡틴락 #한경록 #이상면 #칼럼 #삽화

#한겨레 #캡틴락항해일지 #cryingnut #허름한술집 #신곡 #4월28일 #발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