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충단공원
밥을 먹은 후 나른함이 밀려와 독서실에서 잠만 잘 때, 하기 싫은 일이 너무 많아 답답할 때, 쓸데없는 걱정들이 찾아와 나를 갉아먹을 때. 그럴 때마다 나는 장충단공원으로 간다. 장충단공원은 나에게 편안한 안식처이자 안전한 대피소가 되어준다. 독서실에서 공원까지는 걸어서 10분 정도가 걸리지만, 그곳까지 가는 길에서도 나는 공원의 풀 내음을 맡을 수 있다.
사람이 많아 복잡한 약수역 1번 출구를 지나 한적한 작은 언덕을 올라가다 보면 내가 좋아하는 서울의 건축물들이 하나씩 보인다. 오묘한 벽돌색 대리석 외양으로 이목을 끄는 신라 호텔, 우주선 모양의 거대한 장충체육관, 그사이에 보이는 서울의 상징, 남산 서울타워를 모두 내 눈에 담아냈을 때는 마치 내가 서울을 가진 듯한 느낌이 든다. 서울의 상징들 옆 널찍한 도로를 따라 걷다 보면 장충동 사거리가 나온다. 사거리의 네 모퉁이에 각각 장충단공원, 신라 호텔, 장충교회, 태극당이 자리 잡고 있다. 횡단보도의 길고 긴 신호를 건너면 장충단 공원이 나를 맞이한다.
장충단공원을 산책하는 나만의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첫 번째 코스는 도로와 맞닿아 있는 장충단공원의 가장자리를 크게 한 바퀴 도는 것이고, 두 번째 코스는 장충단공원의 안쪽에 있는 시냇물을 따라 작게 한 바퀴 도는 것이다. 사람과 친해지는 과정과 비슷하게, 공원과 먼저 인사를 한 후 더 가까운 곳에서 공원을 알아간다.
시끄러운 도로와 조용한 공원 사이의 경계선에 첫 번째 산책길이 있다. 이 길을 걸으며 나는 적절히 어우러진 도시 소음과 자연의 소음을 느낄 수 있다. 너무 조용하지도, 시끄럽지도 않은 이 길은 공원의 밖에 있던 내가 공원의 안쪽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주파수를 맞추는 과정이다.
공원의 주파수에 나를 맞춘 뒤, 시냇물 옆에 있는 두 번째 산책길을 걷는다. 나무판자로 깔끔히 정리된 첫 번째 산책길과는 다르게 두 번째 산책길은 주변 잔디의 머리가 벗겨져 보인 모래로 이루어져 있다. 공원의 안쪽은 도로의 소음 없이 오직 공원의 소리로 가득 차 있다. 시냇물 옆 벤치에 앉아서 그 소리에 집중하다 보면 고민과 걱정들로 지저분했던 내 머릿속이 새하얗게 모두 지워져 있다. 조용한 시냇물 소리는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출렁이는 큰 파도를 잠재운다. 졸졸 물 흐르는 소리가 주는 청량함, 푸르른 나무들과 형형색색의 꽃들이 선물해주는 시각적 풍요로움,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자연스럽게 콧속으로 들어오는 싱그러운 풀 내음, 울퉁불퉁한 모래자갈의 정겨운 촉감. 내 몸의 모든 감각을 일깨워 이 공간에 집중시킨다. 일차원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들에 집중하다 보면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신 듯 마음이 편안해진다. 나의 몸과 마음이 편안하게 풀어진 이곳에서 나는 나의 불안감을 씻어내고 고민거리들의 해결 방안을 고안해낸다. 감각적인 이곳에서는 참신하고 새로운 생각들이 마구 떠오른다.
장충단공원은 자신을 나에게 있는 그대로 보여준 것밖에 한 게 없지만, 나는 이 공원의 존재만으로 큰 위로를 받는다. 나의 오감을 만족시키며 정말 편안히 쉴 수 있는 곳. 공원을 기점으로 시간이 다르게 흘러가는 곳. 이곳이 바로 나의 무릉도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