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즈음의 기아에게 고급차 시장에서의 성공은 반드시 이루고 싶던 오랜 숙원이었습니다. 당시 2000년 대에 지속됐던 오랜 암흑기를 피터 슈라이어를 영입해 극복한 기아는 플래그십 세단을 통해 화룡점정을 찍고 싶었습니다. 또한 국내는 물론 글로벌 시장에서 독일/일본 브랜드들과 본격적인 경쟁을 위해서는 브랜드 고급화가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또한 같은 그룹사의 현대는 제네시스의 성공적인 런칭을 통해 브랜드 고급화를 위한 플랜을 차근차근 진행해나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시점에 내외부의 모든 기대를 업고 등장한 차량이 K 시리즈의 완성 "K9"이었습니다.
K9 출시 당시 R 시리즈와 K7/K5의 K 시리즈의 연이은 성공으로 인해 기아 내부의 분위기는 그 어느 때보다 좋았습니다. 하지만 마냥 K9의 성공을 자신하기는 힘들었습니다. 기아는 "오피러스"라는 고급 세단이 있기는 했지만 벤츠, BMW, 아우디, 렉서스 같은 수입차는 물론 에쿠스/제네시스에 비해서도 "고급감"이 떨어지는 차량이었습니다. 이는 다시 말해 기아 내부에 5~6천만 원 이상의 고급 차량을 본격적으로 판매해본 경험이 내재화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기아가 이전에는 진출하지 못했던 미지의 영역에 도전이라는 점에서 약간의 불안감이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출시 과정에서 검토되었던 별도 브랜드로의 분리 혹은 별도 엠블럼 부착 등이 무산되고, KIA 마크로 고급차 시장에서 승부해야 한다는 점도 마음에 걸렸습니다.
물론 긍정적인 요소도 많았습니다. 당시 대중화되지 않았던 헤드업 디스플레이와 각종 ADAS 기능 등 현대자동차그룹이 보유한 최신의 기술을 아낌없이 투입한 결과 확보한 상품성은 분명 막강한 경쟁력이었습니다. 여기에 정몽구 회장 역시 업무용 차량으로 에쿠스 대신 K9을 타고 다니면서 신제품에 신임과 지지를 보내줬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듯이 실패였습니다. 런칭 초기 옵션질 논란과 BMW와의 디자인 유사성 논란으로 곤욕을 치른 K9은 초기 3개월간은 평균 1,500대가량 판매하며 선전했으나 곧바로 판매량이 곤두박질치면서 다시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기아는 대규모 연식변경, 빠른 F/L 등 쓸 수 있는 모든 카드를 사용하며 막대한 마케팅 비용을 투자했으나 K9 1세대는 끝내 부활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비록 K9은 제네시스와 에쿠스 사이의 애매한 포지셔닝으로 인해 시장에서 성공하지는 못하고 존재감이 별로 없었지만 "차는 좋더라"라는 평판을 만들어내는 데는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어찌됐건 G80보다는 한 급 위의 포지셔닝에 성공했으며, 가성비 좋은 대형 세단의 이미지도 만들어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2018년 기아는 절치부심 끝에 2세대 K9을 런칭했고 2012년과는 다른 결과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2세대 K9의 판매 추이는 긍정적입니다. 출시 후 3개월 만에 판매가 급격하게 하락했던 2012년에 비해 올해는 5개월 동안 판매 추이가 유지되고 있습니다. 제네시스 브랜드로 독립한 EQ900, G80이 신차가 출시된 지 오래되어 경쟁력이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K9 1세대의 라이프 사이클 말기의 판매량을 감안하면 정말 격세지감입니다.
가장 최신의 ADAS & 인포테인먼트 기능을 갖춘 플래그십 세단+ 가성비
제품이 상향 평준화됨에 따라 플래그십 세단일수록 점점 더 ADAS 경쟁력이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이는 K9 1세대가 등장했던 2012년과는 또 다른 상황으로 그 당시에 비해 ADAS 기능도 더욱 다양해졌으며, 완성도의 중요성은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습니다. K9은 이런 면에서 현재 국내의 대형 세단 중 가장 최신의 ADAS가 적용된 차로서 경쟁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K9은 차로유지보조(LFA), 전방/후측방/후방교차 충돌방지보조(FCA/BCA-R/RCCA), 안전하차보조(SEA), 내비게이션 기반 스마트 크루즈 컨트롤(NSCC), 터널 연동 윈도우/공조 자동 제어 등 대중화되어 있는 ADAS 기능들은 모두 기본 적용하면서 최첨단의 이미지를 불어넣고 있는 동시에 높은 가성비를 구현했습니다.
K9에 적용된 내비게이션 기반 스마트크루즈 컨트롤은 곡선 구간, 과속위험구간 진입 전 감속이 자동으로 이루어지는 등 이전의 스마트 크루즈 컨트롤 대비 한층 더 진일보한 성능을 자랑합니다.
거기에 12.3인치 대형 화면이 적용된 인포테인먼트 시스템은 애플 카플레이, 구글 안드로이드 오토를 지원하면서 시간이 지나면서 활용성이 더 증대될 것으로 보입니다.
이전과 다르게 논란이 없으며, 타겟의 취향에 맞는 디자인
BMW 디자인 카피 논란은 K9 1세대의 판매량에 치명적이었습니다. 고급차일수록 이러한 "오리지널리티"논란은 타격이 큽니다. 우선 누구도 비싼 돈을 내면서 아류를 사고 싶지 않습니다. 때문에 이러한 논란은 발생한 것만으로 각 브랜드마다 나름의 가치가 명확히 정립되어 있는 고급차 시장에서 차량에 대한 평판에 치명적입니다. 두 번째로 고급차를 사는 소비자일수록 "피곤한 일"을 싫어합니다. 카피 논란이 가짜더라도 굳이 그것을 주변 사람들에게 설명하는 것은 몹시 귀찮은 일입니다. 이런 점에서 K9 1세대는 아무리 디자인을 변경하더라도 한번 돌아선 소비자의 마음을 쉽게 돌이키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2세대는 다릅니다. 비록 램프류 등 디테일 부분에서 벤츠를 연상시키기는 하지만 1세대 때처럼 노골적으로 디자인 시비가 있지 않았습니다. 거기에 1세대의 디자인에 비해 2세대의 디자인은 조금 더 타깃층인 40-50대의 선호도가 높은 디자인입니다.
또한 K9은 실내 디자인에 있어서도 최신의 룩을 유지하며서 G80/EQ900을 고민하는 소비자들에게 어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디자인 경쟁력을 바탕으로 K9 2세대는 비교적 롱런의 기반을 마련하는 데 성공한 것으로 보입니다.
고급차 판매의 노하우 내재화
기아 영업 조직 내부적으로 5~6천만 원 이상의 차량을 팔아본 경험이 누적된 것도 긍정적입니다. 제품이 정말 좋다면야 공격적인 영업 없이도 판매가 가능하지만, 고급차 시장의 도전자인 기아 입장에서 이를 바라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더군다나 법인 판매가 중요한 국내 대형차 시장에서는 영업 능력도 판매량을 좌우하는 데 분명 중요한 변수입니다.
지난 6년의 세월 동안 K9을 판매하면서 기아 영업사원들에게는 유무형으로 고급차 판매를 위한 노하우가 쌓였습니다. 또한 스팅어같은 차량의 런칭 역시 이러한 경험이 쌓이는 데 도움을 줬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신차의 출시는 공격적인 영업이 가능하게 하는 요인이었습니다.
기아 K9 2세대의 미래는 어떨까요? 지금과 같은 훈풍이 계속될 수 있을까요? 가장 큰 변수는 눈 앞에 닥친 제네시스 EQ900과 G80의 상품성 리뉴얼일 것입니다. 또한 수입차 시장이 지속적으로 성장함에 따라 기아는 물론 현대차조차도 고급차 시장에서는 도전자의 입장으로 임할 수밖에 없는 것을 감안하면 앞으로의 경쟁도 분명 녹록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확실한 건 K9이 2세대에 걸쳐 그래도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냈다는 것입니다. 이 자리는 고급차 시장에서 기아가 자신들의 방식으로 오랜 세월 밀어붙인 끝에 만들어낸 값진 자리입니다. 일단은 기반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한 만큼 K9과 기아의 고급차 시장에서의 운명을 무조건 부정적으로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시장에 안착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만큼 가장 어려운 일을 해낸 지금 현재로서는 미래가 긍정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단 시장에 안착한만큼 경쟁사들이 흔들릴 때 기회를 노려볼 정도는 충분히 자리 잡았으니까요.
기아에게 필요한 것은 시장에 안착했던 것처럼 본인들의 방식으로 일관성 있게 K9과 기아의 가치를 커뮤니케이션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런칭 후 제대로 육성해 나가기 위한 플랜, 그리고 마음과 돈의 준비 없이 무리하게 서브 고급 브랜드를 런칭하기보다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