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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리슨 Apr 19. 2020

<내가 하늘에서 떨어졌을 때>를 읽었다

2019년 국내에 출간된 최고의 논픽션을 한 권만 꼽는다면 단연 이 책일 것이다. 지난 몇 달간 마음이 갑갑할 때마다 말간 햇살이 길게 들어오는 창가에 앉아 이 번역서를 펼치곤 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나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페루의 어느 깊은 숲속으로 들어갔다. ‘픽션은 허구, 논픽션은 실제’라는 단순한 편견을 가진 애서가는 거의 없을 것이다. 픽션은 대개 실재하는 직간접적 경험의 확장 또는 변형이고, 논픽션은 생각보다 훨씬 더 주관적인 감각과 상상의 산물이다. 그러니 단지 논픽션이라서 더 진실하다거나 생생하다고 말할 순 없다.


다만 이 책이 항상 나를 어딘가로 데려갈 수 있었던 데에는 분명 논픽션이라는 장르의 힘이 작용했다. 물론 그 힘이란 잘 쓴 문장의 힘이나 문학적 힘 같은 건 아닐 것이다. 오히려 잘 쓰려고 애쓰지 않은 책의 특성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그 힘이란 어쩌면 저자 자신에게 일어난 일과 본인 몸에 새겨진 감정을 치열하게 전달하고자 애쓴 의지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문학적으로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기 위해 쓴 글이 아니라,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스스로 납득하기 위해, 그리고 내 특별한 경험을 다른 누군가도 체험해볼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이 더 크게 반영된 글의 힘일 것이다. 그러니 문장이 무지하게 멋들어지지 않아도, 짜임새가 다소 부족해도, 때로는 완벽하지 않은 번역에도 그런 책들은 충분히 근사한 이야기로 다가올 수 있는 것 같다.





사실 이 책은 ‘비행기 추락 사고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라는 한 줄 컨셉만으로도 그 같은 실화를 좋아하는 독자들의 구미를 당길 만하다. 베르너 헤어조크가 찍은 다큐멘터리로도 유명하다는 점 역시 내러티브 논픽션 팬들의 관심을 끌 것이다. 3킬로미터 상공에서 떨어진 열일곱 살 여성 율리아네가 어쩌다 목숨을 건졌으며, 심지어 11일간 야생의 밀림을 떠돌다 운 좋게 살아남아 대형 참사의 유일한 생존자가 되었는지는 그 자체로 흥미진진한 스토리다. 하지만 이 책은 그것 말고도 흥미로운 에피소드들로 가득하다. 그중 하나는 율리아네의 아빠가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이자 모국인 독일을 어렵게 떠나 페루로 오기까지의 기나긴 여정이다. 매우 짧게 소개되었을 뿐이지만, 그 몇 페이지만으로도 나는 가슴이 뛰었다.


또 하나는 율리아네의 생환 후 언론이 보인 행태에 대한 그의 코멘트다. 서구의 언론이 율리아네를 어떻게 취재했으며 얼마나 불성실하게 부정확한 기사를 써댔는지에 대한 저자의 비판은 당사자가 아니라면 쉽게 간파할 수 없을 진실의 단면들을 보여준다. 그때로부터 50년이 지난 2020년에도 언론의 불순한 행태와 섬세하지 못한 시선을 끊임없이 경험하는 우리로선 더욱 눈길이 가는 대목이다. 사실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언론뿐 아니라 적지 않은 사람들이 얼마나 자주 오해와 오독을 저지르며 심지어 그것을 즐기는지 알 수 있다. 실제로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이 현상이나 사물을 꼼꼼히 살피지 않은 채 해석하고 결론 내리길 좋아하니까.


생환 이후 율리아네가 살아온 이야기도 무척 흥미롭지만, 어쨌거나 이 책에 주목하게 되는 포인트는 결국 뒤표지에 적힌 대로 ‘한 소녀의 기적 같은 생존 스토리’다. 아파트 900층 높이에서 좌석째 튕겨 나온 사람이 극적으로 살아남아 강물을 따라 이동하다 구조되기까지의 이야기는 읽을 때마다 새롭고, 자꾸 저자의 용감함과 총명함에 감탄하게 된다. 그래서 처음엔 ‘재난 실화’를 다룬 작품들, 예컨대 <127시간>이라든가 영화 <얼라이브>가 떠오르기도 했다. 한편으론 우리에게 익숙한 세월호 참사와 성수대교 붕괴 같은 끔찍한 인재들이 떠오른다. ‘한 소녀의 생존 실화’라는 점에선 작년 여름 충북의 한 야산에서 실종됐다가 열흘 만에 구조된 중학생이 떠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내게 ‘생존기’라기보다는 자연과 생명, 용기와 본능, 죽음과 이별 등의 소재가 뒤섞인, 그래서 상상력을 쉼 없이 자극하는 ‘모험기’로 읽힌다. 인생이 일종의 모험이라면, 이것은 실로 너무도 많은 게 담긴 인생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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