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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리슨 Jun 29. 2022

<장기불황>을 다시 읽었다




유동성 잔치는 코로나19 이전부터 벌어지고 있었다. 성장률이 매년 3% 언저리로 죽을 쒔고, 초저금리 정책은 지속됐으며, 다들 디플레이션을 우려했다. 기업과 부자들의 돈은 생산 부문에 투자되지 않고 투기 시장에 쏠렸다. 이게 내가 기억하는 5년 전 상황이다. 당시 서울의 셋집 시세를 살펴보고 있었기에 부동산 동향에 관심이 좀 있었는데, 나 같은 투알못이 보아도 2017~2018년 국내 부동산은 이미 거품이 잔뜩 껴 있었다. 빚잔치는 2019년에도 이어졌고 가계 부채는 순식간에 1500조를 찍었다. 그러다 2020년에 코로나가 터지고 어마어마한 돈이 풀리면서 잔치는 금세 대형 축제로 변했다. 존 리 같은 치들이 공중파에 나와 ‘젊은이들이여, 장기적으로 주식 투자를 하라’며 기만적인 소리를 지껄여대면, 증권사와 언론사 등이 ‘동학 개미’라는 무망한 이름의 무리를 양산해냈다.


축제의 부작용과 후유증은 당연한 수순이다. 아직 시작도 안 한 이 금융 붕괴가 얼마나 끔찍한 광경을 우리 앞에 펼쳐놓을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엄청난 대가를 치르게 되리란 사실은 명백하다. 미국은 지난 금융 위기 때 막대한 가계 부채를 털어내(수많은 사람들을 희생시키고 은행들은 구제해줌으로써) 한 차례 조정을 받았지만, 그때 구조 조정을 거의 받지 않은 한국은 이번이야말로 그 어느 국가보다 위험하다는 게 중론이다. 특히 부동산이 그렇다. 금리가 가장 큰 문제겠지만, 한국은 심지어 망할 놈의 전세 제도가 있는 나라다. 투기성 사금융의 일종인 전세(특히 전세 대출과 갭 투기)로 인해 매매가(와 월세)에는 늘 상당한 거품이 들러붙어 있다.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이 막대한 부채(거품)는 성장을 가로막고, 이 부채가 손상되려면 침체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침체의 낙폭을 최대한 줄이려다 보면 장기 불황을 피할 수가 없어지게 되는데, 이것이 <장기불황>의 저자 마이클 로버츠가 던지는 논지 중 하나다.


2010년대 중반에 쓰인 이 책은 2008~2009년을 대침체의 출발점으로 규정한 뒤 이후의 불황을 예상하는데, 그의 해석은 현재까지 유효해 보인다. 그가 말하는 불황의 원인은 물론 이윤율 하락이다. 기업들이 투자를 하지 않는 이유가 이윤율 하락에 있으며, 가공 자본으로서의 신용(크레딧, 거품)이 점차 공공 부채와 민간 부채 모두를 높여 경제를 둔화시킨다는 것이다. 기업들의 순자산 이윤율이 하락하는 동안 주식 가격은 오른다. 기업은 자사주 되사기를 되풀이하고, 부채가 증가한다. 수익을 내는 기업이 줄어든다. 그 결과, 부채 위기 혹은 신용 위기는 화폐 경제로서의 자본주의 생산 양식이 실패작임을 입증하게 된다. “금융 자본은 그 가격이 자본주의 생산의 가치 및 이윤율과의 관계를 잃어버리기 때문에 허구가 된다.” 다시 성장률이 올라가려면 침체를 겪어야 한다. 그래야 생산 비용과 자본 가치를 충분히 떨어뜨려 살아남은 기업들의 이윤율이 올라간다. 이것은 이미 우리가 2008년에 본 것이고, 1997년에 본 것이며, 1930년대에 본 것이다.


폴 크루그먼과 같은 주류 케인스주의 경제학자들은 항상 부채가 별문제 되지 않을 거라 말해왔다. 경제 위기는 예측할 수 없는 거라고도 말한다. 그러나 마이클 로버츠는 경기 순환과 호황-불황의 패턴이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자본주의 자체에 태생적인 경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필요를 위해 생산하는 체제가 아니라 이윤을 위해 생산하는 체제로서의 특정한 동향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마이클 로버츠는 자본주의가 파국으로 치닫는 또 하나의 징후가 바로 자본가들이 기후 위기에 대처하는 방식이라고 말한다. 세계의 기후 전문가들이 지금 당장 눈앞의 불을 끄지 않으면 우리에게 남는 건 잿더미밖에 없다고 외치고 있는데도, 자본주의의 조종간을 잡은 인간들은 그 손을 놓을 생각이 없다. 지금의 체제가 아닌 새로운 사회 구성체가 들어서지 않는 이상, 생태 재앙은 불과 몇십 년 안에 들이닥쳐 취약 계층부터 집어삼킬 것이다.


마이클 로버츠는 오직 대다수 사람들(세계 노동계급)의 의식 있는 집단행동만이 현재의 자본주의를 다른 사회구성체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말하며 ‘새로운 야만주의의 탄생’을 경고한다. 그 야만주의란 노동생산성과 삶의 조건이 자본주의 이전 시대로까지 전락하는 것이다. 이쯤 되면 내 머릿속에 십수 년간 단단히 틀어박혀 있는 마르크스의 이 말이 두둥실 떠오른다. “모든 주식 협잡꾼은 언젠가 뇌우가 떨어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이 자기 옆 사람의 머리에 떨어지길 바란다.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나와는 상관없다’는 것이 모든 자본가들의 좌우명이다.” 이 구절만큼 노골적인 표현이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노라면, 이러기 정말 싫지만, 나 역시 피케티 같은 사람들의 회의적 전망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잠시 아늑한 좌절감 속에 생각을 누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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