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이 있는 것들은 자란다.

꿈꾸는 서른넷

by Caraish

지금 살고 있는 집에 처음 이사 왔을 때 전에 살던 분들이 남겨 놓고 간 가구들이 몇 개 있었다. 밝은 갈색톤의 나무 바닥과 잘 어울리는 베이지색톤의 깔끔한 소파, 젊은 커플에게 어울릴 법한 아이랜드 식탁, 그 밖에 집안 곳곳 남겨져있는 작은 테이블이나 화분이었다.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건 적어도 나보다 키가 두 뼘은 족히 큰 대나무 화분이었다. 푸르르고 싱그러웠고 집안 분위기와도 잘 어울렸다. 싱그러움을 유지하기 위해 난 대나무 관리 법을 인터넷에 찾아가면서 처음 한 달 동안 물을 주었다. 사실 식물을 키우거나 집안에 화분을 들이는 것을 썩 달가워하지 않는 편이지만 이왕 우리 집에 함께 하게 된 생명체이니 꽤 열심을 내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잎이 지거나 떨어지지도 않았고 새로운 잎이 나는 것도 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관찰에 관찰을 거듭한 결과 난 깨달았다. 그 대나무는 가짜라는 것을. 맙소사. 그렇다. 난 인조 식물에 물을 주고 있던 것이다. 기가 막혀 한동안 웃음밖에 나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몇 년이 흐르고 작년에 우리 집에 조화가 아닌 진짜 식물을 들였다. 생명력이 강한 산세베리아 스네이크 플랜트. 물을 자주 주지 않는데도 정말 쑥쑥 잘 자란다. 선선한 바람이 아침저녁으로 잘 통하는 창문 옆에 배치해 놓고 적당한 바람, 빛, 물만으로도 새싹은 계속 자라난다. 새삼 신비롭다. 가까이에서 바라보면 더 예쁘다. 하긴 우리 아이들도 그렇다. 적당한 영양 공급과 수면, 그리고 사랑을 먹고 쑥쑥 잘 자라난다. 특히 잠든 모습을 가까이에서 바라보고 있자면 꽁꽁 얼었던 마음이 햇살에 스르르 녹아내리는듯한 느낌이 들고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너무 사랑스럽다. 아마 부모라면 다 공감할 수 있는 심정일 것이다.


생명이 있는 것들의 특징은 바로 자란다는 것이다. 자라는 시기를 지나면 물론 지는 시기가 올 것이다. 하지만 먼저 자라야 한다. 꽃 한번 피워보지 못하고, 싱그러운 잎사귀 한 번 내지 못한 채 지는 건 꽤나 슬픈 일이다. 대학생 시절 읽었던 '아프니까 청춘이다'에서 인생을 스물네 시간 하루에 비유했던 게 떠오른다. 우리가 인생을 아흔까지 산다고 가정하면 태어나서 서른 살까지는 하루가 시작되는 밤 열두 시부터 오전 여덟 시까지, 서른부터 예순까지는 오전 여덟 시부터 오후 네시, 그리고 예순부터 아흔까지는 오후 네시부터 다시 하루가 마감되는 밤 열 두시 까지라는 비유이다.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말 같다. 그리고 이 비유로 현재 내 삶을 비추어본다면 난 고작 이제 오전 여덟 시를 막 지난 거나 다름없다. 하루 일과를 시작하고, 아침 식사를 끝내고 내가 맡은 일에 한창 분주하게 집중하고 몰두해 있을 시간이다. 다른 말로 하면 계속 자라나야 할 시기이다. 영양분을 계속 공급받아야 하고 적당한 햇빛과 바람을 쐬며 내 안에 있는 성장판을 자극해서 성장을 이루어야 할 시간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현실은 고달프다. 육아의 현장에서 매일 허우적거리고 살림에 쫓기며 일에 치여산다. 서른이 넘어가고 가정을 이루고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면서 정말 쉬운 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다. 힘들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냐만 비빌 언덕이 절실하다. 물론 이 평범한 일상이 너무나도 감사한 일이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안다. 하지만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워킹맘으로, 그리고 임신과 출산을 두 번 거친 삼십 대 여성으로 내가 가장 힘들어하는 부분 중 하나는 바로 나의 이상주의자의 면모이다. 다른 말로, 내가 바라고 원하고 그리는 나의 삶의 모습과 지금의 나를 직시할 때 오는 괴리감이다. 계속 성장하고 자라나고 이루어야 할 모습들이 아직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는데 그것들이 희미해져 가는걸, 아니 희미하다 못해 뿌옇게 얼룩져 지워지기 일부 직전의 모습으로 변형된 것을 묵묵히 바라보고 인정해야 하는 것에서 오는 쓰림이다.


꼭 커리어적인 측면만을 얘기하는 건 아니다. 엄마가 되기 이전의 나, 그냥 한 여자로서 꿈꾸고 하고 싶었던 모든 일이 포함된다. 물론 다 포기했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면 이런 글을 쓰고 있지도 않을 것이다. 그저 '엄마'라는 타이틀이 가져온 변수가 너무 크다는 하소연을 하고 싶은 것 같다. '엄마'라는 이름이 가져다주는 따뜻함의 깊이만큼 그에 따르는 온전한 역할과 책임의 무게는 묵직하다. 우리 전 세대의 여성분들이, 세상의 모든 엄마들이 존경스럽게만 느껴진다. 나 또한 적당히 타협하고 희생할 법도 한데 그게 쉽지 않다. '이만하면 잘하고 있잖아'라고 스스로에게 위안을 건네보기도 하고 남편도 항상 옆에서 서포트해주고 있지만, 마치 운전대를 쥐고 시동은 켜 있지만 스탑 사인 앞에 머물러 있는 듯한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굴러갈 차가 있고 차에 기름이 있고 시동도 켜 있어서 모멘텀을 유지하고 있는 것만으로 그저 감사할 때가 있는가 하면 쌩쌩 달리고 싶은 조바심이 나기도 한다.


내일이 되면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것조차 사치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런 작은 고민의 순간들이 계속 성장을 이루는 밑거름이 된다는 걸 안다. 아직 생명의 끈이 있음에 감사하며. 햇빛과 바람과 물이 돼주는 나의 사람들이 있음에도 감사하며. 무엇보다 내가 정성과 사랑으로 돌보아야 할 나의 열매, 새싹들, 두 딸이 있음에 감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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