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메이드 재난 영화
안녕하세요! 카라멜팝콘입니다.
무더위가 좀 가시나 싶더니 여전합니다.
영화 <터널> 보셨나요? 이번엔 이 영화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합니다.
하정우가 출연하는 재난영화로 기대를 모았던 영화인데요,
<더 테러 라이브>에서 보여줬던 하정우의 폐소 연기를 기억하시는 분들이라면,
또 <끝까지 간다>에서 보았던 김성훈 감독의 깔끔한 연출을 기억하시는 분들이라면,
이 영화는 그 이상이라는 걸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간만에 평론가 분들과 생각이 비슷했네요.
영화는 기아자동차의 딜러이자 대리로서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김정수(하정우)가 우연히 신도시로 향하다 무너져버린 터널에 갇히면서 시작됩니다. 처음에는 금방 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붕괴규모가상상 이상으로 커서 구조작업을 하는데만 2주 이상이 소요되버리죠.
김정수는 침착하게 목숨을 연명해 나갑니다. 작은 생수 2통과 아직 전하지 못한 딸의 생일 케이크를 대신 먹으면서 말이죠. 영화는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좁디 좁은 붕괴 터널에서 펼쳐지는 에피소드와 정수의 감정, 또 터널 밖에서 벌어지는 해프닝을 잘 버무립니다.
살고자 하는 사람과 구하고자 하는 사람, 기다리는 사람의 모습을 적절하게 담아내고 있습니다.
공간의 제약이 있다보니 어쩌면 지루하다고 느낄 수도 있지만, 제 개인적인 느낌으로는 지루함은 거의 느끼지 못했습니다. 터널 안에서 정수의 희노애락이 고스란히 전달되고 있으며 과도한 신파나 눈물 짜내기식 감동팔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는 매우 현실적인 재난 영화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관객인 저도 겪을 수 있다고 생각되는 설정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많은 사람이 갇힌 것도 아닌 정수와 민아, 단 두 사람만 갇히게 되는 상황이죠.
이 출발 자체가 참 좋았던 것 같습니다.
단순히 생존자의 사투를 보여주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 나오는 소소한 웃음들이 관객들이 훨씬 더 현실적이라고 느끼게 합니다. 사실 가만히 생각해보면 터널에 갇힌채 2주 동안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저 역시도 거기에 적응이 된 삶을 살지 않을까요? 제 나름대로의 요령과 루틴을 세워가면서 말이죠. 밖에서는 날 꺼내려고 노력하고있을테니 나는 그냥 저냥 적당히 살아만 있기 위한 방법을 생각해 갈거고, 나가서 기분 좋게 샤워할 생각으로 가득차 있겠죠.
영화는 바로 이 지점을 과하지 않게 오히려 실감나게 관객에게 전달하고있습니다. 생존자가 진짜 생존해서 구조 되기까지 오로지 절망만으로 가득차 있는 것도 아니며, 나가기 위해 필사적으로 액션을 취할 수도 없다는 걸 말이죠.
정수와 같이 갇힌 미나, 두 사람을 통해 인간의 존엄성 뿐만 아니라 탱이라는 강아지를 통해 '생명' 자체의 존엄성에 대해서도 놓치지 않고, 또 억지스럽지도 않게 다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가 진짜 힘을 갖는 이유는 대한민국이 처한 현실을 터널이라는 한정된 공간을 통해 너무도 날카롭게 보여주고 있다는 데 있는 것 같습니다. 재난영화라고 해서 수많은 사람을 등장시키거나 희생시키지 않으면서 터널과 정수를 통해 정부, 언론, 사회의 책임과 역할에 대해 꼬집어 내고 있다는 것이죠.
정부의 늑장대응이나 미흡한 시스템은 물론, 언론의 시청률 우선주의,나만 아니면 된다는 식의 여론몰이 등 우리가 사건사고 때마다 접하는우리 주변의 모습들을 다시 상기시켜 줍니다.
하정우의 폐소 연기는 현대판 로빈슨 크루소나 한국버전 캐스트 어웨이를 연상시킬만큼 인상적입니다. 터널 안 자신의 망가진 차와 또 다른 생존자 민아의 차를 힘겹게 오가며 터뜨리는 그의 희노애락은 하정우식 연기가 절정에 이르렀음을 보여줍니다. 하정우의 의상이 어떻게 변해가는지 관찰하시는 것도 영화의 숨은 재미 중 하나일 겁니다. 사실상 영화를 온전히 혼자서 이끌어 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부족한 부분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더 테러 라이브>에서도 스튜디오에 갇혀 연기했던 경험이 더욱 업그레이드 된 것 같습니다.
김정수의 아내인 세연(배두나)의 감정연기도 좋았고, 그것을 전달하는 방식도 인위적 설정이 적어서 좋았습니다. 재난현장에서 충분히 있을 법한 피해자 가족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보여주었다고 생각됩니다.
평소보다는 훨씬 진지한 모습의 구조반장 대경(오달수)는 정말 멋있는 역할이었습니다. 평소보다 조금 더 진지하다 하더라도 오달수는 오달수니까요. 하지만 영화의 스토리와 컨셉상 과한 애드립은 자제했던 것으로 보이며, 애드립이 아닌 스토리와 액션으로 소소한 웃음을 전달해 줍니다.
아쉬운 부분을 이야기 하자면 또 다른 생존자 미나입니다. 다른 요소들과 달리 미나는 그 등장부터 좀 뜬금없는 편입니다. 차라리 죽어있는 상태에서 탱이만 등장시키는 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잠깐 들었구요. 미나의 연기도 다른 쟁쟁한 대선배들 때문인지 몰라도 부자연스럽다는 느낌이 더 강했습니다.
최근 <부산행>, <인천상륙작전> 등 한국 대작영화들과는 달리 분명한 메세지를 가지고 있다는 점은 특이할만합니다. <부산행>이 1200만을 향해 갈만큼 흥행열풍이고 2시간을 즐기기에는 부족함이 전혀 없지만, 보고 나서 찬찬히 다시 되짚어 볼만한 영화인가에 대한 아쉬움은 있었습니다. 또한 <폰부스>, <127시간>, <배리드> 등 폐소를 배경으로 한 웰메이드 외국영화들에 대해 굉장한 동경을 가지고 있던 저에게 완성도 높은 <터널> 관람은 상당히 반가운 경험이었습니다.
묵직하지만 무겁지 않은 영화. 오랜만에 좋은 영화를 봤습니다.
(5개: 재미+작품성=어머, 이건 꼭 봐야해!)
(4개: 작품성or재미=딱히 싫어하는 취향이 아니라면 보면 좋을 영화)
(3개: 무난하게 볼 수 있는 킬링타임용)
(2개: 취향을 심하게 타거나 굳이 안 봐도 될...)
(1개: 왜 만들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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