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내린 인수봉에서,
미리 만난 알프스

알프스 체험판 '인수봉 고독길'

by 바위타는 은설

스위스 체르마트와

이탈리아 체르비니아 사이에 솟은 이 산은,

수많은 바위조각으로 이루어진

마테호른(Matterhorn, 4,478m)입니다.


피라미드같으면서도 기하학적인 매혹적인 실루엣.

하지만 그 아름다움만큼이나 잔인한 산.


사실상 회른리 릿지

난이도는 높지 않다고 하지만,
바위로 이루어진 길에서 한 번의 치명적인 실수는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질만큼 위험한 곳입니다.


실제로 난이도에 비해

사망 사고가 잦은 곳이기도 합니다.



이번에 소개할 등반은

마테호른을 직접 대비한 훈련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그에 못지않은 하루였습니다.


어쩌면 알프스에 가보기 전,
체험판으로 경험해보는 것도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


이 등반은
“눈 내린 고독길을 가보고 싶다”는

제민님의 한마디에서 시작됐습니다.


저는 고독길에 가본 적이 없었지만
워낙 쉽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제가 선등을 서려 했습니다.


하지만 제민님이 위험할 것 같다며
본인이 줄을 걸겠다고 했죠.


나중에 들으니,
아무도 선등을 서주지 않아서
결국 스스로 나섰다는 웃픈 사연이 있었다고 합니다.


20250319_094351.jpg?type=w773 하루재에서 바라본 인수봉


이 때 눈치챘어야 했습니다.
대설이 내린 다음 날이었으니까요.


저는 아무것도 모르고 해맑게 알겠다고 했고,
하루재에서 인수봉을 바라보면서도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런 예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20250319_115652.jpg 고독길 2피치


고독길은 북향이었고,

1피치 이후에는 해가 전혀 들지않아

눈이 잔뜩 쌓인 바위틈을 헤치며 전진해야했습니다.


준비가 미흡한 상태로

전혀 예상치못한 환경에 노출되어

상당히 고된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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핫팩과 스패츠, 여분의 양말...

많은 것이 아쉬웠던 하루였습니다.


20250319_151804.jpg?type=w773


고독길의 난이도는 5.8도 채 되지 않지만,

이날의 인수봉은 완전히 다른 세계처럼 느껴졌습니다.


위기감을 느꼈을 때는
이미 되돌아가기에도 애매한 위치였고,
결국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20250319_140545.jpg?type=w773


얼어붙은 손과 발을 움켜쥐며 들었던 생각은,
‘이곳은 인수봉이라서 괜찮지만
만약 처음 오는 곳이었다면
과연 잘 하산할 수 있었을까?’

미흡한 준비가 부를 수 있는 결과를 상상하니
등골이 서늘해졌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국내에서 이런 경험을 해본 것이 다행이었고,

혹한의 상황 속에서

제민님과의 신뢰를 더 단단히 쌓을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해가 지기 전

영자크랙까지는 도착할 수 있었지만,

미끄러운 크랙에서 연속된 슬립으로 인해

정상으로 오르지 않고

전면으로 하강하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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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묻힌 눈 속의 하강포인트를 찾아

무사히 바닥까지 내려왔고,

싸늘하게 식은 몸과 발을

컵라면 한 그릇으로 녹인 뒤

하산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추위 속에서 괴로웠던 건 사실이지만,

그날의 고독길은 해가 닿지 않는 음지에서

눈과 바람, 얼음이 뒤섞인

겨울의 끝자락을 한껏 느낄 수 있었던 하루였습니다.


만약 알프스에서의 등반을 꿈꾸는 분이 계신다면,
눈 내린 인수봉의 고독길을 한 번 경험해보시길 바랍니다.


아마, 알프스를 조금 일찍
간접 경험할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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