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끝자락, 눈 위에서 노는 법을 배웠다

몽블랑보다 살짝 낮은 선자령에서

by 바위타는 은설

바로 알프스 여행기를 시작하기에는 아쉬워

국내에서 했던 원정훈련과 원정대상지를

가볍게 소개하고 넘어가려 합니다.


사실 저는 직접 가서 보기 전까지

머릿속에 제대로 그려지지 않았거든요.


화살표가 가리키는 뒤로 보이는 뭉툭한 언덕이 몽블랑



이번 원정에서의 첫 번째 대상지인

몽블랑(Mont Blanc, 4810m)은 서유럽 최고봉이자,

사계절 내내 만년설로 덮인 산입니다.


한때는 오를 수 없는 곳이라 여겨질 만큼

사람들의 정복욕을 불타오르게 했지만,

지금은 등반 장비와 기술이 발전하며

적절한 준비와 훈련을 한다면

누구나 도전할 수 있는 산이 되었죠.


히말라야의 초고봉들에 비하면

‘엄청 높다’고 하기도 애매하고,

그렇다고 만만하게 볼 수도 없어서

지금에 와서는 어딘가 묘한 포지션의 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클라이머들이 오르고 싶어 하는 이유는,

그곳이 단순한 ‘정상’이 아니라

알피니즘의 상징이기 때문이겠죠.


프랑스 샤모니에서 몽블랑을 오르는 길은

크게 두가지로 나뉩니다.


바로 구떼 루트코스믹 루트입니다.


1.구떼 산장 루트 (Goûter Route / Normal Route)


곤돌라와 트램을 타고

니데글(Nid d’Aigle)역에서 내려 시작하는 코스로,

긴 트레킹과 릿지를 거쳐 도착하는

구떼 산장에서 시작하는 루트입니다.


테크닉보다는 체력과 설상보행 능력만으로도

몽블랑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몽블랑을 오르는 등반자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코스입니다만,

지금은 구떼 산장 예약 오픈 시

가이드에게 우선권을 주는 시스템으로 바뀌어

일반 등반자는 산장 예약이 어려워졌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게 된 루트는

두번째로 소개할 코스믹 루트입니다.


처음에 코스믹 릿지와 혼동했는데

이름은 비슷하지만 성격이 다릅니다.


2.코스믹 산장 루트 (Cosmiques Route / Trois Monts Route)



케이블카를 타고 에귀디미디(Aiguille du Midi) 전망대에 오른 뒤,

코스믹 산장(Refuge des Cosmiques) 으로 접근합니다.


코스믹 루트 경로

그 뒤에

몽블랑 뒤 타큘(4,248m)

몽 모디(4,465m)를 넘어

몽블랑(4,810m)에 이르는

클래식한 알파인 루트로서,


3개의 봉우리를 넘는다 하여

트루아 몽(Trois Monts)

혹은 '쓰리몽 루트'라고도 불립니다.



가파른 설벽과 빙벽을 오르는 기술,

강한 체력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루트입니다.



제민님은 국내에서 훈련하던 내내

“몽블랑은 그냥 걸어서 가는 곳이야.

70대 할머니도 다녀오셨대.”라고

농담처럼 말하곤 했습니다.


저는 정말로 그 말을 믿었는데,

다녀와보니 몽블랑은

단순한 체력 이상의 준비가 필요한 곳이었습니다.


크램폰을 신고 눈 길을 걷는 감각,

피켈을 사용하는 기술 등..


하지만 원정얘기를 했을 무렵은

이미 겨울이 끝나가던 때였지만,

운 좋게도 3월 초 강원도에 갑작스러운 폭설이 내렸습니다.


설상훈련을 한 번도 받아보지않은 저는

제민님의 설상 훈련 제안에

망설임 없이 선자령으로 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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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 밤 평창에 도착했을 때,

도로엔 이미 눈이 쌓여 있었고
하룻밤 사이 자동차 타이어가

눈에 파묻혀 버릴 만큼 눈이 쏟아졌습니다.


다음 날, 겨우겨우 차를 눈속에서 빼내고 나서야

몽블랑을 가기로했다는 것이 실감이 나는 듯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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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입로에서 미끄러진 차가 길을 막는 바람에 우회하느라

예정시간보다 조금 늦게 대관령 휴게소에 도착했습니다.


주차장에서 하네스와 크램폰을 착용하고

눈이 덮인 선자령 등산로로 들어섰습니다.


출발 전 공터에서 안자일렌을 설치하고
서로의 간격을 맞춰 걸음을 옮겼습니다.


하지만 평지라 만만할거라 생각했던

선자령의 눈길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습니다.


줄이 발에 걸리기도 하고,

속도를 맞추는 것도 어려웠습니다.


처음해보는 안자일렌에서

줄의 텐션이 느껴질 때마다

‘함께 걸어간다’는 감각도 낯설게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선자령을 가본적이 없어 몰랐는데

등산로가 잘 되어있다보니

3월의 폭설이 내린 선자령에는

평일임에도 워킹하는 사람들이 꽤 많았습니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평지에서 로프를 매고 있는 우리를

신기하게 쳐다보며 지나갔습니다.


어떤 분은 뭐하는 거냐고 물어보셔서

제민님은 '몽블랑 가려고 훈련하는 중이다'라며

호쾌하게 웃으며 답해주기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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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동선을 방해하지않으려다보니

속도가 나지않아 국사성황당 근처에서

안자일렌을 해체하고 자유 보행으로 전환했습니다.


그 이후에는 빠르게 정상까지 도착할 수 있었고

하산하는 길에는 아무도 가지않은 길을

러셀하며 신나게 내려가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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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리막길이라 다리에 힘은 덜 들었지만,

무릎까지 빠지는 눈을 헤치며 걷는 건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눈을 가르며 나아갈 때마다

왠지 모르게 몽블랑의 어느 설원을

미리 걷는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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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산 후에는 경사면을 찾아

글리세이딩과 자기제동 연습을 했습니다.


처음엔 아래서 보기엔 완만해보였던 경사가

막상 올라가니 아찔하게 느껴져 겁이 났습니다.


하지만 피켈이 눈 속에 꽂히는 순간

왠지모를 희열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몇 번의 연습 끝에 눈은 옷 속까지 스며들었지만,
기분은 이상하리만큼 좋았습니다.


사실 20대 때,

준비 없이 한라산 동계산행에 따라갔다가

저체온증으로 큰일 날 뻔한 뒤로

겨울 아웃도어는 질색이었는데—

이 날 알았습니다.


사람들이 추운 겨울에 산을 찾는 이유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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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실제로 몽블랑을 다녀와보니

제민님의 말과는 달리

선자령보다 훨씬 가파르고, 황량하며,

강한 바람으로 쉴새없이 추운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폭설이 내린 선자령은

몽블랑을 향한 예행연습을 하기에

충분히 좋은 곳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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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끝자락에서 하루 종일 눈 속을 걸었던 그날.


몽블랑보다 조금 낮은 선자령에서
저는 처음으로 ‘눈 위에서 노는 법’을 배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