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블랑을 향하는 첫 걸음마
전 날의 브레방 트레킹이 거대한 몽블랑을 '바라보는' 시간이었다면,
다음 날은 거인의 품속으로 직접 발을 들이는 날입니다.
아침부터 약간의 소동이 있었습니다.
원래는 기차를 탈 계획이었지만 계획은 계획일 뿐.
기차를 놓친 덕분에 버스를 타고 도착한
레 주슈(Les Houches) 마을.
한 정거장을 미리 내리는 바람에 걷게 된 그 길 위에서,
샤모니의 안개 낀 아침 풍경을 조금 더 오래 눈에 담을 수 있었습니다.
케이블카를 타고 벨뷰(Bellevue) 역에 도착했지만
역시나 몽블랑 트램(TMB)은 이미 떠나고 난 뒤 였습니다.
그래서 트램을 기다리는 동안,
박태원 선생님의 지도 아래 특강이 시작되었습니다.
키위 코일을 감는 법부터 크레바스 자력 탈출법까지.
로프를 만지작거리지며 설마 쓸 일이 있겠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마음 한켠으로는 '정말 크레바스에 빠지면 어떡하지'하는 걱정이 들었습니다.
트램을 타고 도착한 종점, 니데글(Nid d’Aigle).
이름답게 자욱한 안개낀 풍경은
마치 포근한 둥지에 들어온 듯한 기분을 안겨주었습니다.
며칠 뒤, 몽블랑 정상에 올랐다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이곳으로 하산할 미래의 우리를 위한 작은 선물을 숨겨두었습니다.
반드시 이곳으로 무사히 내려오겠다 약속대신 말이죠.
아쉽지만 안개로 인해 가려진 풍경을 뒤로하고
다시 에귀디미디(Aiguille du Midi)로 향했습니다.
전망대 터널 끝에 위치한 사진으로만 봤던 그 철문!
그 곳을 내가 넘어가고 있자니 묘한 긴장감과 기대감이 몸을 감싸는 듯 했습니다.
긴장된 마음으로 장비를 착용하고 문 밖으로 나서는 순간,
3,000m 고도의 공기는 어제보다 훨씬 날카롭고 차가웠습니다.
그리고 시작부터 나타난 가파른 내리막 능선.
주변이 뿌옇기에 내가 엄청난 높이에서 걸어간다는 느낌은 아니었지만
발이라도 헛디딘다면 저 아래는 까마득한 절벽일 것임이 분명했습니다.
지난 3월, 선자령에서 설상 워킹이라도 해보지 않았다면
아마 온통 눈으로 가득한 이 곳에서 꼼짝도 못 했을지도 모릅니다.
"경험은 어떻게든 나를 돕는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으며, 한 걸음씩 내디뎠습니다.
어느순간 안개가 걷히며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
코스믹 산장(Cosmiques Hut)은 마치
눈 속 세상의 신기루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코스믹 산장 입구에 도착했지만 시간관계상 하산하는 케이블카를 타기위해
복장만 점검하고 바로 에귀디미디로 돌아가기로 했습니다.
오늘은 예행연습이지만, 내일은 저곳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몽블랑을 향한 진짜 여정을 시작하게 되겠죠.
다시 전망대로 돌아가는 길,
문득 어제 브레방에서 했던 생각이 다시 스쳤습니다.
"내가 진짜 저 높은 곳에 갈 수 있을까?"
숙소로 돌아와 먹는 저녁 만찬은 여전히 맛있고 행복했습니다.
샤모니에 와서 한국보다 더 자주 한식을 먹는 것 같아
어처구니없는 웃음이 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잠자리에 누우니,
오늘 밟았던 그 설원의 감촉이 발바닥에 그대로 남아있는 것 같았습니다.
진짜 눈 위를 걸어본 오늘,
설렘은 어제보다 조금 더 구체적인 모습으로 다가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