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발 2,500m부터 시작하는 고소적응
떠들썩했던 샤모니의 첫 날이 조용히 저물고,
이윽고 몽블랑 원정대의 일정이 밝았습니다.
생애 가장 높이 올라가본 곳이
한라산 진달래대피소였던 저는,
전날 밤 선생님이 주신 고산약을
조심스레 반알정도만 먹고 잤습니다.
하지만 그 때문인지 새벽에 화장실을 가느라
여러번 일어나며 잠을 설쳤고,
기대와는 달리 저조한 컨디션으로
첫 고소적응 훈련을 맞이하게 됐습니다.
물을 자주 마셔야
혈액순환이 원활해지고
고소증 예방에도 좋다고 했지만,
평상시에도 물을 잘 안마시는 편이라
'원정 동안 물을 자주 마시기'라는 작은 미션이
저에게는 훈련만큼이나 어려운 과제였습니다.
그 대신,
일행들이 깨기 전 혼자 일어나
조용한 아침 산책을 즐길 수 있었던건
작지만 호사스러운 일탈이었습니다.
선선한 공기 속에서 바라본
에귀디미디와 몽블랑의 하얀 능선은
이상하고도 신비로운 풍경이었습니다.
산책을 마치고 돌아와서
브레방 트레킹을 위한 배낭을 꾸렸습니다.
이 날은 첫 고소적응을 위한 일정으로
곤돌라를 한 번 타고 환승역에 내려
정상까지 걸어서 오르는 코스였습니다.
저와 제민님은 훈련을 이유로
몽블랑 갈 때와 똑같이 비박짐까지 챙겼다가
선생님께 단단히 혼이 나고나서야
불필요한 짐을 덜어내고
숙소를 나설 수 있었습니다.
브레방 정상은 2,525m.
케이블카를 두 번 타면
금세 정상에 닿을 수 있지만
고소적응을 위해 우리는
중간역 플랑프라(Plan Praz)에서 내려
표고차 약 500m 정도를
천천히 걸어올라가기로 했습니다.
샤모니의 아침 9시는
아웃도어를 즐기려는 사람들의 시간인지,
일반 관광객의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았습니다.
트레킹이 시작되자
암벽들 사이에 자라난 녹음들이
우리나라 산의 빽빽한 숲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줬습니다.
주변은 시원하게 뚫려있고
저 멀리 보이는 특색있는 바위산들과
맞은편에 만년설로 덮인 산들은
"아, 내가 정말 먼 곳에 왔구나."
하고 새삼스러운 실감을 안겨주었습니다.
정상까지는 평이한 등산로와
약간의 황량한 바윗길을 지나 도착할 수 있었고,
난이도 있는 구간은 없어서
풍경을 즐기며 천천히 걷기 좋은 코스였습니다.
브레방 전망대는
몽블랑을 바로 맞은편에서
조망할 수 있는 포토스팟이었습니다.
시내에서는 원근감때문에
몽블랑이 제일 낮아보였지만,
브레방 정상에서는
4,810m 위엄을 제대로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아침까지만 해도
"나는 충분히 훈련을 했다."는 자신감으로 가득했는데,
막상 무거운 배낭을 메고 걸어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습니다.
"내가 진짜 몽블랑을 갈 수 있을까?"
설렘과 걱정이 묘하게 뒤섞인 마음으로
정상 카페에 앉아 잠시 여유를 즐겼습니다.
케이블카를 타고 빠르게
샤모니 시내로 내려온 뒤에는
에귀디미디 케이블카를 타고
3,842m의 전망대로 향했습니다.
‘The Step into the Void’에서 기념사진도 찍고,
몽블랑 전시관을 돌아보고,
앞으로 우리가 오를 루트도 구경하고
몽블랑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습니다.
우연히 샤모니로 연수를 온
코오롱 등산학교 강사님들을 만나
박태원 선생님이 반가움에 회포를 푸신 덕에
첫 고소적응 훈련은 예상보다 일찍 마무리되었습니다.
프랑스까지와서
한국사람을 이렇게 많이 만나다니
정말 세상이 좁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날 밤, 브레방 전망대에서 보았던 몽블랑이
쉬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다음 날 알프스의 진짜 눈 위를 걷게 될 생각을 하니
설렘이 천천히 가슴을 채워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