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서기 시작

나도 몰랐던 나를 찾기까지

by 푸른 반딧불

1. 배우자와의 만남과 이별 그리고 뒤늦은 대학 입학


누구든지 감추고 싶은 삶이 있고 들어내고 싶은 삶이 있다. 지금 그 시절을 떠올리며 조금씩 과거와 현재를 오가게 된다. 어느덧 상담센터를 개업한 지 2007년부터니까 19년째이다. 그전에 입사해서 1년을 근무했던 곳이 , '00 가정폭력상담소'이다.

그곳에 입사하러 가기 전에 사이버대학에 다니며 꿈을 키웠다. 대학은 나에게 꿈을 갖게 해 주었다. 비록 얼굴을 보고 만나진 않아도 당시에 나는 오히려 그게 더 편했다.


그때 나이는 46세였지만 마음은 20대 대학생이 되고 싶었다. 젊은 시절 다니고 싶었던 꿈 많던 시절은 아닐지라도 배우고 싶은 욕구와 열정만큼은 충분했다. 그렇게 모니터를 보면서 수업을 들었다. 보통 이 나이라면 자녀들도 있고 남편도 있겠지만 혼자가 되면서 제일 먼저 선택한 것이 생계를 스스로 해결해야 되니 텔레마케터로 취업을 했고 그다음 선택이 대학 입학이었다.


46세에 홀로 시작하면서 암담했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공부하고자 하는 욕구만은 누구도 막을 수 없을 만큼 강열했었다.


마치 누군가 대학 졸업장을 가지고 오면 사회는 대접을 해 줄 것 만 같았다. 그건 당시 내가 살면서 느꼈던 학력의 벽이다.


맏딸로 살면서 대학 가겠다는 것은 부모님께 말할 수 없던 그런 시대였고 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의 사업이 부도나서 가정 형편이 어려워져 고등학교 진학도 어머니의 교육적인 강한 의지가 없었더라면 상상할 수 없었다.


'82년생 김지영' 영화 속 주인공의 엄마와 같은 시대 사람이다. 아들은 집안의 기둥이고 맏딸은 살림밑천이라는, 말하자면 용도가 다양했던, 집에서 살림도 할 수 있고, 조금 키워서 남의 집에 보내면 식구도 줄이고 돈도 벌어 다 주고, 어린 나이에 초등학교 정도 졸업하고 나면 잘 사는 집안 풍습 배워서 시집보내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하던 시절, 형제는 4명에서 8명 정도가 흔하던 시절이었다.








할아버지로부터 어깨 너머 배운 목재업으로 부모님은 결혼 후 60년대 초, 목재소를 시작하여 번창하였다. 나의 초기기억은 5세이다. 우리 집에도 시골에서 온 언니들이 나중엔 세명이나 되었고 직원이 40여 명이 넘었다. 저학년 때는 따뜻한 점심도시락을 꼭 챙겨서 창가에 갖다 두고 가는 직원이 있었다. 옷은 큰 도시에 가서 사다 입혔고 부모님은 학교에 필요한 비품등을 사다 주시고 과외는 6학년까지 담임에게 받았고 중학교에 가서는 영수 과외를 따로 받았다.


부자로 살면서 무섭고 강한 아버지의 사랑은 철없고 눈치 없이 제 잘난 멋으로 살았고 어머니의 교육열은 훗날 홀로서기에 밑거름이 되었다.


25세에 몇 번 만나지도 않고 선택한 결혼 이유는 이버지가 어머니를 엄청 챙기시는데 나도 독립해서 나를 사랑해 주는 남편 만나 내 가정을 꾸리고 싶었다. 조용하고 차분한 음성과 공손한 태도, 매너 등이 충분히 자기 여자를 챙겨주리라 믿었다.


친정엄마는 남편이 직장인이라 너무 맘에 들어하셨으나 한편으론 홀어머니라 여러 가지로 걱정도 많으셨다.


남편은 나를 배우자나 여자로서가 아닌 어머니의 며느리로 순종하며 살기를 바랐다. 시아버지가 안 계신 집안에서 남편은 가족 모두의 아버지 같은 존재로 책임과 헌신을 받아들이는 그런 가장이었다.


홀어머니는 자기주장이 강하셨고 소리를 지르며 호통치시면 무서웠다. 그리고 가족들의 유대관계는 일반가정과 달리 응집력이 강했다. 모계사회에 내가 들어온 것이었다. 5년이 지난 무렵 지방으로 내려와 독립을 한 뒤는 오로지 일뿐이고 성공하기 위한 회사의 부품처럼 그렇게 살며 가장은 있지만 남편은 늘 출장 중 인 듯 지방으로 돌며 전국에서 몇 등을 하였다는 그 목표와 승진걱정 퇴직 당하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며 살았다. 그 시절엔 나도 직장생활을 하였다. 여기저기 이력서를 넣고 회사생활을 하며 자신감을 회복하며 나는 내 삶을 살고 싶다 생각했다.


남편에게 사랑받고 싶은 강력한 애착 욕구는 아마도 아버지가 어머니를 원하듯 오직 엄마였던 그런 것을 원했지만 언제나 전화나 애정표현을 하지 않는 남편에 대한 갈증은 삼각관계를 심화시키고 변화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결혼 15년 만에 남편에 대한 나의 소유권을 포기하는 마음으로 난 이혼을 선택했다.


이혼 후 몇 년 지나 에게 나의 존재에 대해 물었을 때 그는 내게 말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는 당신이 내게 첫 번째가 될 수 없어. 나는 그게 사람의 도리라고 배웠어"라는 말을 들었다.


그런 사고를 갖고 있는 애들 아빠는 결혼생활 내내 배우자의 역할은 후순위로 밀려 있었고 집안의 가장으로 살며 시어머니와 정서적 배우자로,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 두 딸의 친정아버지가 되고 나서도 쉽게 변화되지는 않았다.


그는 저쪽 강 너머에서 바라보는 그런 사람일 뿐, 서로의 몸과 맘을 다 줘도 아깝지 않을 거라 꿈꾸던 부부관계가 아니라, 우린 역할로 선택된 부부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훗날,

내가 왜 이런 결혼을 하게 되었고,

배우자에 대한 이끌림과 또한 배우자를 선택하게 되는 원리는 무엇인지 엄청난 궁금증이,


그것도 한 번도 아닌 두 번의 이혼이, 그 두 번째 이혼은 가정폭력으로 살 수가 없어 만난 지 7년 만에 탈출하 듯, 몸만 나온,

생존이 기적이라 할 수 있는 처절한 이혼이었다.


내가 선택한 늦은 나이에 공부는 결국 '나'에 대해 알고자 함이었고,

상담학을 전공하는 직접적인 동기부여가 되어 그 지적 호기심은 62세까지 대학원을 마쳤.


교수님들이 운영하시는 연구소나 세미나에 다니며 많은 시간 '나는 누구인가'와 '부부 만남의 원리'를 터득하기 위한 시간으로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