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 잘못된 경제관념

대출

by 푸른 반딧불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내가 무엇이 문제인지 잘 몰랐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하니 '대출에 대해 잘 못된 생각을 갖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말하자면 경제관념이다. 하루아침에 그런 개념이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가장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은 부모의 경제관념 혹은 부모의 행동모델의 학습이다.


나의 경제 기준의 근거는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사업을 하시는 분이고 할머니는 일찍 돌아가시어 군생활을 10여 년 하면서 특무상사로 제대하고 나와 어머니(19세)를 만나면서 삶과 청춘이 시작되었다. 그때 아버지는 25세였다. 모든 것을 아이디어로 일궈내신 사업가였는데 아버지의 모델도 할아버지였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를 기억해 보면 내 나이 21세 경이었는데, 시골 판사의 관사로 사용했던 제법 넓은 우리 집에 오셔서 계셨었다. 할아버지의 검정 오버코트 주머니에는 늘 두둑한 서류봉투가 있었다.


들리는 말로는 대전시 인동에서 큰 목재소를 하셨고. 아버지도 시골에서 목재소를 하셨다. 추정해 보면 아버지 목재업의 근원은 할아버지였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시골에 있을 때 육촌 큰집도 큰 제재소를 운영하였고 매우 부자였다.


나의 초기 기억은 더 이전이지만 6세 기억은 그때 동네에서 큰 부자가 났다며 부모님은 바빴고, 파출소 맞은편 큰 제재소로 이사를 하여, 아버지와 작은아버지가 함께 목재소를 운영하였다. 그게 7세 무렵이고 5학년에 이사 가기 전까지 초등학교 시절은 아주 부잣집 딸로 부러움을 샀고, 직원이 40여 명이 되는 것은 사진으로도 보았으니, 아저씨 또는 일하는 오빠들의 귀여움을 한 몸에 사기도 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안 계신 가정에서 남동생도 일찍 잃게 되어 홀로 이모님 댁에 가서 살면서 어렵고 외로운 어린 시절을 보내셨지만 책임감이 강하여 방직공장 다니며 번돈을 외할머니를 갖다 주며 친정의 가게 자금을 만들어 주셨다고 외삼촌에게서 들었다.


어머니는 자신이 못 다했던 공부를 자녀들에게 시키고자 하는 마음은 엄청났다. 그러한 열정은 맏딸인 내가 혜택을 많이 받았다. 새 학기가 되면 공부를 하고자 하는 학부모들과 함께 인사를 나누고, 담임선생님 집으로 가서 5~6명이 과외를 받았는데 초교 내내 우등상을 받으며 중학교 2학년 때까지 영수 과외도 했다.


그다음 이사를 간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무렵 시장 근처에 넓은 집에서 연탄 도매업을 하셨고, 어머니는 가정 형편이 어려운 남자 고등학교 1학년을 1등으로 들어간 장학생을 하숙비 대신 우리 가정교사로 방을 제공해 주셨다. 환경이 바뀌어도 어머니는 남동생과 내 공부를 위하여 엄청난 희생과 노력을 해 주셨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내게 해주신 말씀이 있는데 '내가 아무리 없어도, 고쟁이를 팔아서라도 나는 너를 가리키겠다.'며 결심과 의지에 찬 어머니의 모습은 내게 오랫동안 각인되어 46세에 내 인생의 전환기에서 어머니에게 다하지 못한 불효와 죄송스러운 마음을 헤아려, 상담센터를 운영하면서 62세까지 공부하여 그나마 자립의 기초가 되었다. 하지만 문제의 요지는 바로 대출을 받아 아파트를 사서 임대를 하기 시작한 게 문제였다.


다시 돌아가서, 중학교 2학년 15세에 아버지는 건설회사를 하시다가 부도가 났다. 가정 형편은 어려웠지만, 나의 목표는 00에 있는 고등학교에 시험 보고 진학하려고 했다. 결국 합격 후 학교 기숙사에서 1학기 동안 있었고, 나중에는 기숙사비를 계속 낼 수 없는 형편이어서 친구네 집에 가서 자기도 하였을 때 엄마는 속 아파하셨다.


처음 이사 온 곳은 말 그대로 피신이었지만 외사촌 아저씨가 도와주어, 그 동네 어떤 창고에서 살았다. 평상 마루판에다 전구에 철망을 두른 건데, 보통 자동차 고칠 때 불을 켜는 용도로 사용한다. 그런데 우리 가족은 그것으로 온열을 하며 지냈다. 그래도 가족을 다 볼 수 있어 좋았다. 아버지는 나무상자를 만들어 00 소주 회사에 소주 담는 상자나, 고추장 된장 담는 나무상자를 제작하여 납품하면서 자식의 생계를 책임지시며 이사를 다녔다.


조금 더 나은 집으로 이사를 갔으나, 남의 집 살이와 고등학교 2학년 때 수학 여행비 7천 원이 없어서 졸업여행을 못 보내 준 것에 맘 아파하셨다. 여행 못 간 학생들은 신탄진 연초제조공장 잔디 마당에 둘러앉아 소풍을 대신했다.


부모님은 맏딸인 내게 미안해하면서도 남동생들을 위해 희생해 주기를 바라셨다. 당시에 맏딸들은 대부분 중학교 졸업이 당연하던 시절이었고, 고등학교 졸업은 사실 그 상황에서 엄청난 희생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 가진 것 없이 4명의 자식에게 학비나 생활비로 얼마나 앞이 깜깜 하였을지 충분히 이해가 된다.


어머니는 직장 다니는 사람에게 시집가서 엄마처럼 계획성 없이 사는 삶을 절대 살면 안 된다고 하셨다. 고등학교 졸업 한 뒤에는 교회 뒷 집이었는데 전세 집에서 살았다. 그리고 남들은 대학을 다니지만 나는 부기와 타자학원을 다니며 자격증을 따서 서울로 상경하여 시청 근처 무역회사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렇게 어린 시절 이사를 많이 다니고 20세 이후 맨몸으로 와서 외할아버지 댁에 있다가 친구집에 있다가 월급모아 월세 보증금 100만 원을 만들기까지 3년 정도 걸렸다. 그러면서도 자랑스럽고 이소룡 닮은 든든한 큰 동생 체육 대학 다니는 2년 동안 스테인리스 찬합에 반찬 1통, 밥 1통 싸서 운동하는데 배고프지 않을까 도시락 싸주며 부모님은 장남이 잘되어야 집안이 잘된다고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