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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간의 아일랜드 생활을 끝내다.

아일랜드 워킹홀리데이에서 이제는 세계일주.

마무리를 해야할 때가 왔고, 그래서 애증의 주방일을  그만뒀다. 사실 울 줄 알았는데 겨우 울지는 않았다. 진짜 추억이 많은 곳이었다. 처음 아일랜드 와서 천 만원이 넘는 돈을 2달여 만에 흥청 망청쓰고, 정신을 차리고 신문을 팔기 시작하면서, 아일랜드 대기업 취직에 대한 욕심은 버렸었다. 안 해본 거 해보자라는 생각으로 주방일을 시도했었다. 일본인 매니저에게 연락해서, 솔직히 말했다. '경험 없다. 하지만 잘할 수 있다. 군대에서 일머리 배워왔다. 그리고 못하거나 열심히 안 하면 뽑아놓고 바로 잘라도 된다. 그때는 돈도 안 받겠다.' 그렇게 트라이얼 기회가 잡혔고, 주어진 기회에 감사하며 열심히 임했다. 자세는 최대한 낮게, 비 맞으며 신문 안 파는 게 어딘가라는 생각으로 일했다. 그렇게 실수 투성이었지만 좋게 봐 준 상우와 다른 주방 사람들 덕분에 나는 풀타임으로 8개월간 주방에서 일할 수 있었다.


'아!' 처음에는 왜 이리 이해가 안 가는 게 많던지, 빨리하라고 하면서 깨끗하게 하라는 것과, 쓴 물건을 1분 뒤에 다시 쓸 것인데 제자리에  돌려놓으라는 것 등이 절대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물론 지나고 보니 왜 그런지 알게 되었지만, 당시에는 그런 이해가 안 가는 부분과 함께, 일도 못했고, 초밥 몰래 훔쳐먹다가 사장한테 들켰는데. 그 이후로 찍힌 거 같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사장님의 무한히 들어오는 디스... 집으로 돌아가란다. 그냥 하는 말이라고 주방 사람들이 말했지만, 이게 바로 고용불안이구나 하는 것을 느꼈었다.


 그래도 기회는 주어졌다. 다시 잘 보일 수 있는 기회 말이다. 우연한 기회로, 판매 매장 청소까지 같이 했었는데, 나는 혼신의 힘을 다해서 바닥 미싱질을 해왔었다. 사단장님 부대 방문 당일날 급으로 청소했었다. 그런데 사장은 알아봐주지 않더라. 바닥에는 관심이 없었던 탓이다. 그러다가, 스케줄 착각으로 청소하는 날 지각을 했고 나는 평소보다 더 빨리 열심히 하고, 사장에게 연락했다. '지각해서 미안하다고, 오늘 청소한 거 마음에 안 들면 오늘치 돈 안 받겠다. 그리고 부족하면 내일 아침이라도 나와서 다시 청소하겠다.'


 그때 이런 패기는 어디서 나왔는지... 이미 머리가 커져버린 지금은 하지 못할 일이다. 아무튼 그날 아침에 사장이 매장을 확인하고는 주방에 물었다. '어제 청소 누구였냐'고 말이다. 나는 달려나갔다. '28 이거 큰일 났구나!' 완벽하다 생각했는데 나 잘리는 건가 생각했다. 그런데 엄지 척하며, 잘했단다. 우와 처음 칭찬받았다. 그게 주방 일하고 3개월 만이었던 거 같다.


 그런 사장에게 몇 주전에 나 이제 그만둔다고 말했더니, 화내더라. 다른 이유들도 복합적이었지만, 적어도 내가 주방에서 어느 정도 인정은 받았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정이 많이 들었다. 내 모든 이야기들 다 할 수 있었던 주방 사람들. 내 밥과 여행 경비를 마련하게 해 준 사장. 모자라도 잘 봐준 선배들과 괴팍한 성격에도 잘 따라준 주방 후배들 모두에게 감사한다.


 한 가지 아쉬운 게 있다. 새로운 사람들을 가르치고 뽑았다. 왜 이렇게 일을 대하는 자세 혹은 삶을 대하는 자세들이 대충인지 모르겠다. 그들에게서 내가 처음에 가졌던 그런 절박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 일이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에서 오는 최선과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젊은 날을 살아간다는 최선을 못 느끼겠다. 아쉽더라. 거기서 오는 아쉬움에 나는  성격이상자처럼 그들을 대했다. 툴툴거리면서 그런 그들에게 나는 친절하지 못 했다. 나는 친절함을 받았지만 나는 친절함을 베풀지 못 했다. 아 물론 주방이 친절함을 나누는 곳이 아니다. 하지만 큰 사람이 되고자 하는 내 바람에서는  또다시 다르게 행동했다. 후회가 남는 한 가지다. 조금 더 친절하게 대할걸. 그래도 주방에서는 블로거도 아니고, 시골 백수도 아니고 나는 그냥 jay일 뿐이다. 그 몫을 다했을 뿐이다 생각한다.


언제 이들을 다시 볼 수 있을까? 지금도 주방에 출근하던 버릇이 남아, 새벽 4시에 일어났다가 출근 준비를 할까 하다가 다시 자는데 언제쯤 그 기억들이 잊힐까? 그러지 않았으면 한다. 주방 사람들이 여행 가는 문어한테 머리에 쓰라고 수건에 글을  적어주었다. 나는 또 거기에 울컥한다. 앞으로의 여행을 더 잘해야 하는 다른 이유가 생겼다.






이제 또 다른 애증의 아일랜드를 떠나기 위해서, 배를 예약했다. 그 전에 밀린 월급과 세금 환급,  처분할 수 있는 물건들을 팔아서 자금을 마련하는 일, 집을 다시  내놓는 일 등 해야 할 일이 좀 많다. 그냥 휙 하고 떠나고 싶은데 그게  말처럼 쉽지만은 않다. 짐이 없다면 아마도 저가항공으로 영국으로 넘어간다면 훨씬 저렴하게 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엄청난 양의 짐이 있기에 배를 타기로 했고, 히치하이킹을 하면서 영국 전역을 구경하고 싶었다. 어쩌면 '하루 만에 나는 영국 서부에서 동부로 넘어갈 것이다.' 생각하며 표를  예약했는지 모르겠다.  


<내 마지막 숙제가 남아있다. 그것은 토미 아저씨를 찾는 일>


 내일부터는 계속 외출이다. 나는 노숙체험을 할 때 도움을 받았던 토미 아저씨를 다시 찾고 싶었다. 그래서 찾을 생각이었다. 사실 토미 아저씨가 술 마시는 곳을 안다. 그곳에서 아저씨를 기다리며 영어 공부를 할 생각이었다. 나는 그 은혜를 잊지 못하겠다. 비록 나는 체험이었지만, 노숙을 했고 구걸을 했다. 아저씨는 그것을 전혀 몰랐고, 나를 도와주었다. 아저씨 덕분에 내가 노숙자라고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한국사람이라고 다 정이 넘치는 것은 아니라는 확신도 가지게 되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사실이 나를 도와준 사람은 돈이 많은 부자도 아닌, 노숙자였고, 나를 걱정해준 사람은 한국인도 아닌 외국인 노숙자였기 때문이다. 아저씨는 나를 위해서 지갑을 털었다. 15유로 지폐와 3유로 동전을 모두 썼다. 2.7유로 맥주와 1유로 콜라, 8유로 치킨을 사줬다. 그리고 동전 3유로까지. 18유로. 우리 돈 2만 원. 내가 하루 종일 구걸했던 돈보다 많은 돈이었다

 나는 아저씨에게 저녁 식사를 대접하고 싶다. 거절한다면, 돈이라도 드리고 싶었다. 적어도 두 배는 드리고 싶다. 내가 아직 가지지 못해, 가진 것이 없어  드라마처럼 등장해서 막 아주 비싼 레스토랑에 같이 가고 호텔에 잠을 재워드리고 그러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서 안타깝지만, 내가 치킨집 2층에서 혼자 흐느꼈던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이게 내 마지막 아일랜드에서의 숙제다. 
아저씨를 남은 5일간 찾아야 했다.

그러고 5일이 지났지만, 나는 찾지 못 했다. 아일랜드 커뮤니티에 '토미 아저씨를 찾는다'는 현상금과 연락처를 남기고 나는 결국 아일랜드를 떠나야 했다. 후회스러웠다. 전심전력을 다해서 찾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게 나는 후회로 남을지 몰랐다. 그때 최선을 다했어야 했다고 나는 후회했다. 그리고 나는 진짜로 짐을 쌌다. 30kg가 조금 넘는 무게, 버리지 못하고 팔지 못한 것들을 모두 가방에 넣었다. 내 근심과 후회를 조금 더 담았고, 무거웠지만 나는 결국 아일랜드를 떠나게 되었다. 새로운 것들을 위해서 말이다. 아마 다른 곳에서 인생에 대해서 더 배우지 않을까? 혹은 사람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기 않을까? 하는 기대와 함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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