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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과거는 이렇다.

열심히 달렸다. 그리고 꽤 쎄게 넘어졌다. 

아무것도 몰랐고, 그래서 더 좋았던 유년기


  진주시 집현면 덕오리에서 태어났다. 당시에 마굿간이 있었고, 하루에 시내로가는 버스가 6대가 전부였다. 거기에는 버스 토큰을 끊는 안내양이 있었고 그게 당연한 줄 알았다. 그 곳에서,  농사짓는 부모님과 친구들과 함께 자랐다. 가끔 농사도 짓고, 농약도 치러갔다. 초등학교는 지금은 폐교되었지만, 졸업 당시 전교생이 60명이 전부였다. 이후에 10명이 안되어서 폐교되었다. 동급생 14명 중에서 나는 싸움을 제일 잘했다. 왜냐하면 태권도를 다녔기 때문에! 공부도 제일 잘했다. 그래서 대통령이 될줄 알았다. 


그래서 였을까? 나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서의 엄석대같은 존재였다. 내가 그렇게 느꼈다. 시골마을에 컴퓨터라고는 정보화 산업으로 초등학교에 설치둔 컴퓨터 들이 전부였고, 우리는 방과후에 게임을 하는게 낙이었다. 구슬치기를 하고, 잣치기를 하던 때는 컴퓨터실이 닫았을 때 뿐이었다. 


그렇게 게임을 다같이 했고, 좋은 아이템이 나오면 나는 친구들에게 달라고 했다. 그러자 친구들은 다 주곤 했다. 내가 괴롭혔고, 못살게 굴었기 때문에 줄 수 밖에 없었던 것 같다. 그렇게 엄석대가 되었지만, 또 동시에 아니기도 했다. 국어 시간에 그 소설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마음이 참 불편했던 기억이 있다. 그랬지만 참 좋은 기억만 있었던 나의 유년기다.


나는 몰랐었던 세계, 중학생 시절


 한마디로, 다른 세계 였다. 14명에서 300명으로 한 학년의 학생 수가 늘었다. 나는 짱에서 노바디가 되었다. 한 학년에 한 반밖에 었는 줄 알았는데, 열 반이 넘었다. 그 속에는 잘난 아이들도 많았다. 시골 친구네 집에는 다들 트럭이 있었고, 농사를 지었지만, 좋은 자가용이 대신 있었고, '사'자 직업의 부모님이 대부분이 었다. 그리고 초반에 기 싸움 한다고 몇번 싸워보니 다른 세계다. 나는 바로, 너무 빠르게 상황에 수긍했다. 그래도 꼭 해야할 기초적인 공부는 했다. 그러던 중에 아버지가 뇌졸중이 와서 쓰러졌다. 한 겨울에 보일러비 아낄려다 난방을 안틀어서 그런일이 있었다 들었다. 그래서 집에 빚이 더 늘어났다. 아픈 아버지 때문에 어머니가 혼자 고생하는게 싫었고 그래서 아버지가 싫었다. 그래도 나는 게임만 했다. 유일한 나의 도피였던 것 같다. 


 아픈 아버지 때문에 고생하는 어머니가 안쓰러웠다. 무슨 이유에서 였는지는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표현에 서툴렀던 아버지는 나를 달래기 보다는 다그치기 일쑤였고, 그런 아버지가 이해 불가능해보였다. 그러던 중에 뇌졸증으로 쓰러지셨고, 어머니는 밤에는 아버지 병간호를 하고, 낮에는 시내에 있는 시장에 나가서 그 해 지었던 토마토를 붉은 대야에 가득 싣고가서 팔아서 생활비를 조금이나마 보태고 계셨다.


나는 알았지만 무시했다. 공부한다 말하고 PC방에가서 게임을 하는게 너무 좋았다. 게임에는 가난이 없었기 때문이었을까? 한창 게임에 빠져있고, 첫사랑인지 짝사랑인지 모를 감정에 같은 버스를 타는 동갑내기 여학생을 좋아했다. 그래서 가끔 같은 버스를 타고 통학하는게 낙이었다.  나는 무시했지만, 집에 빚은 더 늘어갔고, 어머니의 주름은 깊어져만 갔다. 나는 모르게 말이다.


어떤 터닝 포인트였던 고등학생때


 계속 게임만 했다. 그러던 어느날 어머니가 장에 갔다오는 길에 만났는데 무시했다. 사실 많이 부끄러웠다. 그날도 어머니는 시내버스 기사어저씨를 한참이나 멈춰 세워놓고는 팔다 남은 토마토가 가득 담긴 빨간 고무대야에 싣고 계셨다. 어머니도 나를 보았으리라, 눈이 마주쳤고 나는 애써 못 본 척 했는데 나는 알았다. 어머니가 보았지만 모를척 해주신걸 알았다. 한참이나 어색하지만 어색하지 않은 분위기 속에서 나는 짝사랑녀와 이야기를 하며 있었고, 어머니는 대야 발에 끼고 계셨다. 한참이나 갔을까? 버스는 우리 마을에 정차했고, 어머니 혼자서 또 무거운 대야를 내리고 계셨다. 다른 아주머니들이 도와 주셔서 겨우 차에서 내렸고 나는 뒤늦게 내렸다. 


내리고서도 아무 말이 없었다. 마치 모르는 사람 마냥 그렇게 버스가 가기를 기다리고 나는 어머니께 화를 냈다. '왜 하필 이 버스를 타서 쪽팔리게 했냐'고 말이다. 어머니는 아무 말이 없으셨고, 그날 토마토 판 돈을 손에 쥐어주셨다. 아 순간 욕이나왔다. 나는 죽을만큼 부끄러웠다. 몇일인지 몇주인지 용돈을 못 줘서 미안하다며 건내 주셨다. 나는 그걸 받고 집으로 혼자 달렸다. 이불을 뒤집어 쓰고 한참이나 울었다. 아마도 태어나서 가장 많은 눈물을 흘렸으리라 생각한다. 


 찢어지게 가난한 것도 아니었지만 그런 가난이 부끄러웠다. 어쩌면 그냥 나이들고 농사싯는 부모님이 부끄러웠는지도 모른다.  빚이 몇 억이 될만큼 많았지만 가끔 사랑의 리퀘스트에 전화정도는 하고 밥 굶어본적 없었는데, 좋은 자가용 타고 정장입고 다니는 다른 친구들 부모님에 비해서, 부모님이 단지 부끄러웠다. 그래서 가난의 대를 끊자는 미션을 스스로에게 부여했다. 아니 우리 가족 모두의 미션이었다. 누나와 항상 이야기하던 문제였다. 


그때부터 가족 문제가 내 문제처럼 다가왔다. 그런데 방법을 몰랐다. 그래서 선택했던게 아마 공부였던거 같다. 개천에서 용나기 가장 쉬운 방법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공부를 했다. 그때 공부하기로 마음 잡았을 때가 고등학교 3학년으로 올라가던 때 였다. 전교에서 공부로 1등은 못해도 등교는 1등으로 했다. 수위아저씨보다 먼저 와서 아저씨보고 문열어 달라고 했다. 그리고 가장 늦게까지 남아서 공부를 했다. 독서실은 나랑 맞지않았고, 늦게까지 공부하기에는 시골까지 들어가는 막차가 없었다. 돈도 아까웠다. 


그렇게 학원대신에 인강을 듣고 공부를 했다. 수학은 너무 기초가 없어서 과외가 참 받고 싶었고 과외 이야기를 꺼냈다가 여기저기 전화하시며 돈을 빌리시는 어머니 모습에 다시 과외는 나랑 안맞다고 안한다고 했다. 사실 너무 필요했는데 말이다. 그렇게 1년만에 수능성적이 200점 점게 올랐다. 6급에서 1.7등급으로 올랐으니 말이다.


조금은 화려했던 아니면 잘 나갔던 대학생때의 나


그렇게 꽤나 좋은 성적을 받았고, 대학과 학과를 결정하는 문제가 남았다. 안정적인 교사가 되라는 부모님의 의견은 간단히 무시했다. 공부도 내가 했듯이 진로도 내가 정한다는 논리였따. 그렇게 학과는 경영학과 ,적성도 모르고 돈 잘번다는 선생님 말 듣고 지원했다. 그리고 국립대를 갔다. 서울 사립은 갈 형편이 안되었다. 생활비가 비싸다는 소리만 듣고 나 스스로도 겁을 먹었다. 나 스스로도 지원하고도 전형을 포기했다.


 대신에 학교생활을 정말로 열심히 했다. '열정'이라는 단어가 꼭 나를 표현하는 단어인거 처럼 학교생활이 모든 것인 것 처럼 행동했다. 그리고 고등학교 친구는 평생가고 대학교 친구는 그냥 이익관계라는 말이 가장 싫어서 대학 친구들에 올인했었다. 결과적으로 학점은 낮았지만 많은 사람을 만났고, 대표가 되었다. 그리고 좋은 친구들도 많이 만났고 좋은 여자도 만났다. 그리고 ROTC가 되었고, 대기업 취업을 위해서 스펙을 쌓기 시작했다. 학교생활을 열심히 한 덕분인지, 선배들로부터 교수님들로 부터 추천을 받아 장학금도 거의 매학기 마다 받았다. 금액도 학비를 초과할 만큼 장학금을 받았고, 중계 영업관련 알바도 하며 대학 생활을 여유있게 보냈다. 아주 가난했던 고등학교 시절과는 아주 달랐다.  거기에 더해서 부모님으로 부터 적게나마 용돈도 받으며 주변사람 챙기기에 바빴지만 집에는 장학금을 비밀로 했다. 그리고 계속 커지는 씀씀이에 결국엔 학자금 대출도 받았다. 나에게도 빚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래도 사람이 좋았다. 매일 사주고 계산하는 낙에 살았다. 주위에는 항상 사람이 많았다. 나름 그게 행복했다. 또 나름 똑똑했고, 주위에 신망도 받으니 두군데 정도에서 취업 스카웃 제의가 들어왔다. 하지만 내키지 않았다. 당시엔 그런 자신감이 있었다. 더 좋은 곳이 많을거라는 생각 그리고 내가 준비하고 취업하면 얼마나 더 좋은데 갈까? 하는 자만같은 것들이 있었다. 


한반도의 정 반대편으로 간 군생활


 대학 이후 드디어 장교 임관식이라는 것을 하고, 자대를 경기도 파주로 발령받았다. 경상남도 진주라는, 대한민국 정반대에 집이 있다. 그래서 집 자체를 안갔다. 1년에 2번씩 집에 갔다. 휴가는 많았지만 사람들이랑 놀았다. 가족도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는 걸 잊은채 말이다. 그러다가 일이 발생했다. 가장 친한 친구와 내 여자가 이상했다. 불면증이 왔다. 정신과 진료를 받았다. 그래도 우리 병사애들이 위로가 되어서 버텼다. 대신 돈을 모으지 않았다. 월급 일부 집에 보내고, 보험 넣고 다썼다. 하나도 남김 없이 말이다. 나에게 혹은 병사들에게 다 썼다. 내가 병사들에게 1도 아끼지 않았다는 건 그들이 알거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 하나, 취업 준비 그거에 목을 메었고, 군생활도 치열하게 했다.


군 생활도 막 순탁하지는 않았다. 일부 가혹 행위가 있었고, 부대가 막 좋지는 않았지만 작업이든 보고서 만드는 것이든 누구에게 빠지지 않았다. 나는 자신한다. 부대일에 열심히 였던 만큼, 취업 준비도 제대로 했다. 불면증이 온김에 공부를 했을 뿐이다. 복수 아닌 복수하는 길은 내가 성공하는, 대기업에 취업하는 것 뿐이라 생각했다. 자격증 7개, 토익 800, 대외활동, 장교출신이라는 타이틀로 서류지원 29개 합격 20가 최종 결과이다.(서류만 보았을때) 대부분에 전형을 중간에 포기했다. 부대사정으로 입사시험에 많이 응시 할 수 도 없었고, 가고 싶지도 않았다. 가고 싶은 곳은 떨어지기도 했고 말이다.


그러던 와중에 큰 일이 터졌다. 16년간 알고지낸 매형이 사기꾼이었다. 말은 안했지만 크게 의지했다. 시골에 내려와서 잠을 자지는 않았지만 작게라도 챙기는 모습에서 의지가 되었다. 하지만 두 집 살림에 누나 몰래 아버지 명의로 대출까지 하게해서 사업자금 명목으로 2억을 빌려갔단다. 알고 보니 사기였고, 누나는 이혼하고 덕분에 집안은 난리가 났다. 당연하게도 아버지 건강이 다시 악화됬다.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한 의욕의 상실. 내가 믿었던 '사람'에 대한 가치의 훼손. 내가 자살하려하는 병사들 상담하다가 되려, 내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죽음이 먼게 아니구나' 그래서 일단 떠나기로 했다. 도망쳤다.  표를 사고 부모님께 말씀드렸다. '사실 취업안하고 여행간다고 얼마나 걸릴지 모른다고 말이다'. 처음엔 되도 안하는 소리 말고 말리셨지만 '아버지 더 늙기전에 와라'는 조건부 한계를 두고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하지만, 돈이 없었다. 군 생활 다른 동기들 몇 천만원씩 모을 동안 나는 모으지 못 했다. 퇴직금과 친구에게 빌린돈, 보험해지 한돈 1500만원을 들고 여행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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