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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오리 평촌마을에서 코를 흘렸다.

아무도 몰랐던  이야기

오늘은 술도 먹었겠다. 어릴 적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역시 술 먹고 새벽에 글 쓰면 감수성이 폭발하니까. 그러니까 적어야겠다.  나는 소위 말하는 읍면리 출신이다.  그중에서도 평촌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디 동도 아니고 읍도 아니다. 시내라고 불리는 곳까지 차로 한 시간 걸리고 어릴 적에 버스는  '안내양'이 있는 버스였다. 버스는 오전에 두대, 오후에 두대, 저녁에 두대, 여섯 대가 전부인 시골에서 자랐는데, 어릴 적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하도 얄궂게 자라서 기억에 남는 일이 많다. 



                                                <집 앞에 피었던 해바라기와 우리 막내 누나다.>


우리 집은 그 마을 중에서도  지몽골?이라고 하는 더 골짜기로 들어간 마을에 있는 곳에 있었다. 그런 이야기 있지 않은가? 강원도 어디 깊은 산속에선 6.25가 발발했어도 전쟁이 있었는지 몰랐다고. 우리 동네도 전쟁이 난 것을 한참 후 에야 알만큼 외진 데다 있는 곳이다.  그곳에서 흙을 먹고, 개구리를 잡고, 가제를 잡고, 물고기 잡으로 다니고, 가을에는 메뚜기 잠자리도 구워먹고 그렇게 자랐다. 내 친구들도 내 동네 형들도 그랬기 때문에 당시에는 당연한 일이었다. 간식은 국수였고, 부침개였다. 과자를 사러 가려면 귀신이 나온다는 폐가가 있는 산을 넘고,  1시간가량을 또 걸어내려 가야 공판장이 나오는데, 아빠가 공판장 가기 전날이면, 조리뽕이랑, 칸초를 먹고 싶어서 밤잠을 설치곤 했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아무도 믿지 않는다. 경상도에 그런 곳이 어디 있냐고, 그래서 중학교 올라가서는 시골인 게 부끄러워서 말 안 했고, 고등학교 때는 그냥 이유 없었고, 대학 때는 말할 가치가 없었다. 그냥 진주에서 왔다. 농사지었다. 이 정도만 말했는데.  대학교 2학년 농활, 산청에서 논일 하다가 들키고 말았다. 농활 이런 거 20년 동안 해서 안 해도 되는데, 대학 때 인기가 좀 있어서 과대 표니 과짱이니 하는 자리를 맡게 되었다, 하고 싶었고, 그냥 되었다.


그러다 보니 학과 행사에 모두 참석해야 했는데, 결국 농활까지 가게 된 것이다. 잘 모르는 척 티 안 내고 있었는데, 양조장 막걸리를 바로 알아맞히고, 경운기를 얼떨결에 운전하게 돼버려서 들통 나버렸다. 그 이후로 엄청난 작업량에 씨 달렸던 기억이 안다. 그때는 아니 그 보다 이전에 왜 이렇게 도시에 가고 싶어 했을까? 트럭 말고 자가용 타던 친구들 부모님이 왜 이리 부러웠을까? 그리고 개 키우던 마당 있는 집보다 엘리베이터 있는 아파트가 왜 이리 부러웠을까? (초등학교 5학년 때 시내로 전학 간 친구가 있어서, 그 친구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처음 탔는데, 무서워서 주저앉았다. 그리고 한참이나 멀미를 했다.)


지금은 조금은 시내에 가까운 방향으로 5분이나 더 가까이 이사를 했지만, 다시 부산이나 김해로 이사를 준비한다는 누나들 말을 들으니 왠지 그런 추억들이 다 사라질 것 같아서 이제야 아쉽다. 이제는 노인이 돼버린 부모님을 위해서는 시골보다는 사람이 많고 병원이나 시설이 좋은 도시로 가는 게 맞기 때문에 어쩔 수 없지만, 아쉬운 것도 어쩔 수 없다.


지나가야만, 사라져 갈무렵에만 소중함이 생각난다. 참 얄궂다. 그 어릴 적 추억이 라는 게 말이다. 그래서 나는 시골 백수라 부른다. 닉네임이 필요했고, 시골 출신이라는 순수함. 그리고 선택에 의한 백수라는 자유로움을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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