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파독 광부 할아버지를 찾아서!

아버지의 흔적

파독 광부 할아버지를 찾아서!


 종안이와 이런저런 여행에 대한 이야기, 독일 워킹 홀리데이에 대한 이야기 등을 어떤 회포를 풀든 새벽까지 진하게 나누고는 늦게서야 잠이들었고 해가 중천에 떴을 때 쯤에서야 겨우 일어났다. 그리고는 독일에 온 목적인 파독 광부와 파독 간호사 분들을 곧바로 찾아가기로 했다. 조사 한 바는 파독 간호사 광부 협회가 있다는 것, 그것 하나였다. 사실 그곳 위치도 모르고 누가 어디에 계신지도 전혀 몰랐다. 그냥 또 부딪혀 보고 싶었다. 사실 그런 사소한 도전들이 재미가 있었다. 길을 만들어 가는 느낌이 들어서 좋았고, 이렇게 여행을 계속한다면 아마도 잃어버린 '나의 길'이라는 것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희망도 보였기에 그냥 가보고 싶었다. 그래서 일단은 사전 연락없이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에치본 지역의 재독 한인 연합회를 찾아가 보기로 했다. 


 그 곳이라면 광부 아저씨들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와 일단은 어디로든 가야 한다는 마음 때문이었다. 또 내 마음속에 이런 나만의 개똥철학 같은 논리라는게 있었다. 많은 조사를 하고 가면 알고 가기 때문에 시행착오가 적을 것이 분명 했다. 하지만 그 사전 조사 결과가 부정적이라면 시도 조차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 반대로 조사를 하지 않고 일단 시작하고 보면, 엄청난 고생을 하게 된다는 것은 있지만, 설사 사전조사 결과가 부정적이었을지라도 내 스타일 대로 밀고 나갈 수 있다는 점이 있었다. 그렇게 당시에는 조금은 무모한 면이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내 충동에 충실히 따르기로 하고 어떤 사전 조사 없이 그냥 가기로 했다. 한인 연합회에 전화도 해보았지만 안 받기도 했고 그래서 일단은 여정에 나섰다. 아마 전화를 받아서 나 이런 사람이니 도와달라고 하고 아마도 거기서 안 도줬다면 미리 포기했을 것이다. 하지만, 전화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주소만 보고 찾아가는 길이다. 그것도 두 시간 동안 걸어서 말이다. 그날 따라 독일은 더웠다. 습기와 도심의 더위에 짜증도 났지만, 길도 먼저 이리저리 찾아주고, 나를 도와주려 따라와 준 종안이가 고마웠다.


 오후 3시쯤 되었을까? 우리는 에치본에 도착했고, 근처에 보이는 한인들에게 그냥 내가 무작정 말을 걸었다. 일본인이었다. 그러다가 보이는 한글 간판 '깜장 머리 미용실', 0초도 망설임 없이 들어갔다. 나는 알고 있다. 3초를 망설이면, 절대 그곳에 못 들어간다. 노숙자들 만날 때부터 알게 된 노하우였다. 그렇게 불쑥 들 어가서 직원 분께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한국에서 여행하는 청년인데, 나쁜 사람 아니고, 상업적인 목적 아니고, 광부님들이랑 간호사님들 만나 뵙고 이야기 들으려고 하는데, 혹시 아는 정보 있냐고 물으러 왔다고 했다. 딱 그렇게 설명을 드렸다.


 그런데 알고 보니 미용실 더 안쪽에 한 명이 계신다고 했다. 그분께서 바로 이곳 깜장 머리 미용실 창업자라고 했다. 그렇게 나는 연합회에 가기도 전에 광부 아저씨 한 분을 만났다. 그렇게 오늘의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국제시장에서 보던 광부 아저씨의 모습을 직접 뵙게 된 것이다. 그렇게 깜장 머리 미용실 내실에 있는 할아버지를 뵙게 되었다. 처음 보는 나와 종안이를 위해서 일단 시원한 물 한잔을 주셨다. 마침 ‘여섯시 내 고향’을  보고 계시고 있었다. 매일매일 여섯 시 내 고향은 본다고 하셨다. 파독 광부 이셨던 이필영 할아버지는 연세가 75세이다. 이건희 회장이랑 동갑이라고 하셨다. 74년도에 독일로 오셨고, 5년 동안 광부로 일하셨다고 한다. 그렇게 나는 질문들을 차근히 쏟아내었다.


- 왜 독일로 가려고 하셨어요?

보릿고개라고 알란가 모르겠네? 못 먹고 못 살았어. 화장실도 제대로 없어서 푸세식 화장실을 썼어. 화장지도 없어서 신문지로 닦거나 헌책들로 닦았지. 그런데 그 책이랑 신문지 있는 집도 별로 없었어. 그래서 대부분 짚을 뭉쳐다가 겨우 대충 닦았지. 그런 시절이었어. 그리고 우리나라가 얼마나 가난했냐면, 당시에 정주영 씨가 자동차 공업소 차렸을 때, 아스팔트가 깔린 데가 전국에 중앙청하고 서울역 사이에 밖에 없었어. 세계에서 2등으로 못 사는 나라였지. 나도 너무 못 살아서 잘 먹고 잘 살라고 한 거야. 잘 먹고 잘 사는 게 내 꿈이었어.


- 어떻게 독일로 가셨어요?

비행기 타고 갔지, 직항이 없어가지고, 저기 알래스카로 먼저 갔어. 왜냐하면 당시에 소련을 못 건너가니까. 그래서 하얗게 눈밭이 있더라고, 거기서 한 시간을 기다렸어. 거기서 뭐 사 먹을 사람들은 사 먹고 구경하고 하다가 타고 갔지. 뭐 타고 가라고 하는데 잃어버리면 안 되니까 나는 아무 데도 안 가고 있었어. 그래서 도착해가지고 이름 확인하고 일하러 갔어. 한 비행기에 270명이 탔어. 동기생들이지. 대한항공인가 뭔가 몰라. 그때는 대통령도 비행기가 없을 시절이었어. 그런데 우리가 그때 비행기를 탄 거야.


- 광부로 오셔서는 무슨 일 하셨나요?

루르 지역이라고, 독일에서 지하자원이 많은 데가 있어. 거기서 지하 천 미터 아래에서 일했지. 시속 60Km 로 내려가고 올라오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움직였어. 거기서 나는, 뭐라고 해야 하나? 군대 같으면 수색대 첨병? 그런 일을 했어. 다음번 사람들이 탄을 캘 수 있도록 길을 만들고 아무것도 없는 데에다가 설치하러 가는 일을 했어. 호벨이라고 탄 캐는 기계가 들어갈 수 있게 하는 거지.


- 당시에 월급은 얼마나 받으셨어요?


통장을 다 버려서 모르겠는데? 아마 한 3천 마르크 받았을 거야. 그때 당시에 한국에 은행 직원들 10배라고 그랬으니까. 그 돈 모으면 1년에 한 채씩 집산 다고 그랬어. 월급으로 독일 사람들이랑 똑같이 받았어. 다 동일한 날짜에. 다 계좌를 트게 하고 거기로 주더라고. 어디에서 일 하느냐에 따라서 돈이 달랐어. 편하고 안 위험하다 싶은 데는 적게 주고, 위험하다 싶은 데는 많이 주고 그랬지. 나는 제일로 위험한데서 일했지. 제일 앞에서 일하니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잖아. 그래서 일부러 ‘막장’이라고 하는데, 탄광 갱도 끝에서 일하려고 지원하는 사람도 있었고, 막장하려고 왔는데 위험하니까 다른 일 하는 사람도 있고 그랬어. 말을 못 알아들으니까, 일을 선택할 수 있는 선택권? 그런 건 없었어.


- 실제로 일하시는데 위험하진 않으셨어요?

한 달에 한 명씩 죽어나갔지. 한국인이고 뭐고 가릴게 뭐 있어. 사고는 사고지. 안전사고 교육하는 담당자 그 사람도 사고 나서 죽어버렸는데 뭐. 덩치도 엄청나게 크고, 목소리도 굵고 그런 사람이었어. 그 사람하고 나랑 달리기 내기도하던 그런 사이였는데. ‘반틀’이라고 기계가 있거든. 거기에 가끔 돌이 끼면 불꽃이 튀고 그래서 위험해. 그럴 때는 모터를 멈추고 돌을 꺼내고 다시 돌려야 해. 또 돌이 끼여서 그 사람을 불렀단 말이야. 그 사람이 오고 몇 분 뒤에 사람들이 보니까 없더라는 거야? 찾아보니까 저기 기계 밑에 떨어져 죽은 거야. 한국인 중에서도 물론 있었지. ‘판차’라고 탄을 나르는 차가 있어. 거기 옆에서 일하는 친구였는데, 판차 위로 돌이랑 탄이 떨어졌는데, 돌이 칼날처럼 날카롭게 생긴 거야. 거기에 잘려서 가버렸지. 상상 이외의 사고들이 많이 일어났었지.


- 할아버지는 언제가 힘드셨어요?

우리 조가 탄광 아래로 한번 내려가면, 한 번에 3m씩 기계를 설치해야 해. 그런 것보다는 힘든 것이 대화가 안 통하는 것이었어. 잘 못 알아들어서 사고 나면 안 되니까. 그래도 한국 사람들 보다는 정직하고 대우가 괜찮았어. 텃세 같은 것도 안 부리고 말이야. 옛날에 한국 군대처럼 그런 건 없었어. 안전사고 주의하라는 차원에서 뭐라고 하고 그런 건 있어도 독일 사람들이 1차, 2차 세계대전을 겪어서 교육을 잘 받아서 그런지, 인종 차별 이런 건 없었어.


- 여기 제일 처음에 오실 때 무슨 생각으로 오신 거세요?

여기 오면 돈 벌어서 잘 산다. 배고프지 않고! 애들도 있으니까. 그때 가족들이 있었어. 아들이 김포공항에 따라와서는 내 다리를 꼭 잡는 거야. 그래서 '야 절로가' 이랬더니 '나도 갈 거야' 이러는 거야. 그래서 나중에는 가족들을 이리로 다 불러서 직장 잡고 잘 살고 있지. 아들한테 너 그랬었다 그러니까, 자기도 예감이 있어서 그랬다나.


원래는 3년 계약하고 왔었는데, 나는 2년 더 연장했었어. 그랬더니 더 이상 안 해준다고 하더라고. 그래도 열심히 잘했다고, 여기 산업대학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준다고 하더라고. 그런데 들어가기만 하면 뭐해? 알아들어야 할 거 아냐. 그래서 시험을 치렀지. 한글 단어를 독일어로, 독일 단어를 한글로 바꾸는 시험이었어. 그거 통과를 하고 국비로 정밀기계를 공부했어. 그리고 ‘지멘스’에 들어가서 변압기를 다루고 만드는 일을 했지. 다른 동기들도 배우고 일부는 여기 남고, 일부는 한국에 돌아가고 그랬어. 청와대에서 직접 와서 '국가발전을 위해서 여기 있지 말고 본국으로 와라. 대우는 아파트 한 채 주고 월급도 많이 주겠다.' 그랬어. 그래도 안 가는 사람이 많았어.


- 그러면 할아버지는 여기 오신 거 안 후회하세요?

후회 안 해! 내 생각에는 여기가 한국보다 낫다 생각했어. 독일은 전쟁도 끝나서 전쟁 안 하고, 내가 9살 때인가 한국전쟁이 일어났어. 그런데 아직까지 하잖아. 그리고 여기는 당시에 집집마다 수세식 화장실이 있었어. 그때 한국에는 잘 없었거든.


- 제 나이인 26살로 돌아가시면 뭐하고 싶으세요?

내가 공부를 못 했잖아. 내가 그래서 지금도 ‘하버드’를 가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해. 산업대학에서도 시험을 보는데, 내가 전체 2등을 했어. 내가 영 공부를 못하는 건 아니더라고. 필기시험은 거의 만점 나오고, 실기 시험은 2등하고 해서, 그래서 계속 공부를 해볼까? 아니면 돈을 벌어야 하나? 망설였어.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대학을 나와도 또 돈 벌어야 하잖아? 처자식도 있고, 먹여 살려야 할 거 아니야?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후회스러워.


 마지막으로 ‘아 정말 빨리 지나갔구나!’ 느껴, 그래서 하루하루 감사하며 살아라 말해주고 싶어. 내가 젊었을 적에 돈이 없어서 술 담배를 안 했어. 그 돈이 아깝더라고. 그런데 내 동기생들 중에서 술 담배 했던 친구들은 다 아프거나 먼저 가버렸어. 그래서 생각해보면 내가 그때 가난했던 게 오히려 지금은 도움이 되었구나 생각해. 알 수 없는 것이야. 열심히 성실하게, 국민의식을 바꿀 수 있도록 살길바라네.


할아버지는 국가관이 뛰어나셨다. 정치적인 문제에서도 어느 쪽으로 치우치시는 게 아니라 중립이라고 딱 바로 느낄 만큼 깨어있는 의식을 가지고 계셨다. 그리고 어찌 보면 불청객인 우리, 그냥 불쑥 찾아온 우리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많으셨다. 인생 이야기부터 앞으로의 조언까지, 그렇게 잠깐의 만남에 3시간을 투자해주셔서 최대한 더 많은 이야기를 해주시려는 모습에 감동받았다.


 내가 놀랐던 것은 힘들지 않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솔직하게 나는 엄청나게 힘들었고 치열했다고 말씀하시는 모습을 기대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의연하게 넘기셨다. 잘 몰랐다. 어떤 의도에서 그런 말씀을 하신 건지. 아마도 다음 세대인 우리에게 약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려고 그랬던 건 아닐까? 혹은 다들 열심히 살던 시절이어서, 다들 다른 광부들도 그렇게 하던 때여서 그런 말씀을 하신 건 아닐까? 추측해볼 뿐이다.


‘힘들지 않다’라. 과연 광부 일이 힘들지 않았을까? 지금 껏 나의 삶이 힘들었고 나름의 최선을 다하는 삶이었다라고 그간 나 혼자 너무 어리광을 부린 건 아닌가 생각해게 되었다. 다른 광부님들과 자주 왕래를 하지는 않아서 잘 모르지만 지나가는 길에 본인은 항상 미용실에 있으니 들려서 음료수 한잔하고 가라고 하시는 모습이 어디에 있던 우리네 할아버지 모습 같았다. 아니 정확히는 우리 아버지 모습 같았다 그래서 더욱 울컥했다. 힘든 이야기 하시면서 웃으시는 모습에 죄송했다. 그리고 정말로 감사했다. 마지막으로 한번 크게 안아드리고 인사를 드렸다. 감사하다고. 여러 의미의 감사하다는 말이었다. 말씀에 그리고 그의 고생에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설명하지 못할 무언가를 느낀 채로 묵묵히 그리고 조용히 다시 집을 향해서 걸었다. 


6.25 전쟁부터, 월남파병 그리고 파독 광부의 삶 그리고 파독 간호사 할머니와의 삶. 이 모든 것은 영화 국제시장에서의 주인공의 모습이었다. 실제로 할머님은 신문에도 나오시고 책으로도 이야기를 쓰신분이라, 이분들의 삶이 영화의 모티브가 되지 않았다는 보장이 없었다. 그들의 영화였고, 그들의 역사였다.

작가의 이전글 아버지의 편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