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에서 맞는 두번째 추석
해외에서 맞는 3번째 명절인 추석 연휴가 알게모르게 시작되었고, 어느 순간 끝이 나있었다. 한국에서는 되게 요란하던 핸드폰의 알림은 파리의 추석에서는 오지 않았다. 대신에 한인 마트에 가서 송편 정도를 조금 사서 손님들에게 나눠줌으로써 ‘아 오늘이 추석이구나!’하는 추석의 향기만 민박에 잠깐이나마 났을 뿐이었다. 여행을 오기 전, 예전엔 그랬다. 누군가의 기념일이거나, 특별한 날, 명절이면 하루 온종일을 지인들에게 연락을 돌리는데 썼었다. 그게 최소한의 예의이며 배운 사람이라면 그렇게 해야 한다 배웠고,‘한국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인맥’이라는 소리를 사방에서 해대서, 그래서 안하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위아래를 가리지 않고 연락을 돌렸고, 반대로 내 생일날에는 수백 통이 넘는 연락을 받았었다. 올해는 하지 않았다. 아니, 사실 한국을 떠나면서는 그런 인사치레를 하지 않았다. 못했다는 표현도 나의 처지로 보앗을 때 그렇게 틀린 바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게 올해 나는 내 생일도 그냥 보내버렸었다. 아일랜드에서 떠나기 전, 그리고 생일을 맞아 파티를 열고 친구들을 초대해야 한다고 주변에서 성화였지만,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곧 여행을 시작해야 할 때여서 돈 한 푼도 아까웠고, 형식적이고 즐기기만 하는 의미 없는 만남에 시간도 아까웠었다. 내 생일이라면 나를 위해서 써야하는 날 아닌가? 그래서 혼자 있었다. 나에겐 추석도 다르지 않았다. 굳이 명절이라 들뜨고 누군가를 만나 무언가를 하기 보다는 그냥 쉬고 계속 생각을 정리하며 하루를 보냈다.
제법 오래된 영화‘달마야 놀자’에 이런 장면이 있다. 조폭들이 어쩌다가 절에서 머물며 신세를 지게 되었는데 조폭이 어찌하다가 부처상을 깨버리자, 평소 그들이 못마땅하던 스님 한분이 주지스님에게 달려가 이른다. 그러자 되려, 주지 스님은 그 입이 싼 스님을 나무란다. '너는 진짜로 저 쇳덩이가 부처라고 믿고 있었냐고' 말이다. 부처를 생각하는 방법일 뿐이지, 부처상이 부처는 곧 아니었다.
명절도 관계도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인사는 중요하지 않았다. 가끔은 그 인사가 오히려 좀 거북하기도 하지 않은가? 그냥 가끔 생각나서 한번 씩 연락 오는 게 더 좋고, 반대로 그렇게 연락 하는 게 좋은 법이었다. 연락의 빈도보다, 비록 연락은 잘 없더라도 그 너머에 있는 마음이 더 중요했다. 그런 인사 100번 안해도 되니, 진심으로 상대를 더 위하는 게 어떨까? 억지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진심 없는, 그런 보여주기 식 말고 말이다. 그런 보여주기가 없더라도 언젠가는 진심은 통하게 되어있다 보고 있는 요즘이었다.
사실 외로웠기에 이런 생각들을 하게 되었고, 외롭지 않기 위해 그러했을 수도 있다. 어쩌면 공허해진 명절이라는 시간 대신에 매일이 명절 같은, 연휴 같은 하루를 보내는 요즘에서야 왜 사람들은 특별한 날만 특별하게 지내려 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보통의 날들을 특별한 날처럼, 특별한 날들을 일상처럼 보내면 더 행복하고, 의미가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들로 인해서 명절은 내겐 더 이상 의미가 없어졌다.
다만, 부모님 생각에 누나에게 연락을 했더니, 조카가 아프다 했고,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삼촌이 보고 싶다고 하는, 정말이지 말 안 듣는 조카가 오늘따라 유난히 더 보고 싶을 뿐이었다. 그런 추석 즈음에, 아버지에게서, 아니 아직도 '아빠'한테서 한통의 편지가 왔다. 나는 아직 철이 없는지 아빠라는 단어가 편했다. 파리에 한 달 정도 머물렀기 때문에, 파리에 푹 빠진 덕분에 받을 수 있었다. 혹시나 일을 하게 될지도 몰라 국제 운전면허증이 필요했고, 시골집에서부터 보내달라고 했었다. 아마도 파리에서 말고도 여행 중에 돈을 벌 수단을 더 만들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얼마 만에 아빠에게 편지를 받았을까? 인생을 통틀어 두 번째. 처음 군대로 갔을 때, 자대 배치를 받고는 집에 있는 남은 옷가지를 택배로 받았을 때. 그 속에 노트를 찢어서 넣은 글귀들이 있었다. 아빠는 내게 많은 걱정을 하고 계셨고,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셨다. 아쉽고 죄송한 마음. 나 때문에 아직 고생하시는 것 같기도 하고, 뉴스에 외국의 안 좋은 소식이라도 있을 때면 나 때문에 밤잠을 설치고 계신 것 같아 가끔은 나도 마음이 불편했다. 우리 아버지는 또래의 아버지에 비해 연세가 많으시고, 소위 말하는 가방끈이 길지 않으신분.
초졸. 어릴 적엔 부끄러웠다. 가족의 인적사항을 적는 란에 '중졸'이라며 학력위조도 했고, 그것에 당당하기까지 했었다. 그래서 아버지에 대해서는 스스로에게 더 왜곡시키고 있었다. 할아버지 세대에서는 일반적인 일이었지만, 나의 세대에서 초졸 아버지는 흔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아버지가 내게 보낸 편지를 받았는데 맞춤법이 하나도 맞지 않았다. 그때는 그것을 최대한 감추느라 보이지 않았는데 이제는 그것이 분명히 보이더니 가슴이 미어지듯 많이 아파왔다. 어쩌면 그런 우리 집안에 희망일지도 몰랐던 내가 허락도 안 받고, 덜컥 연락도 잘 안하며 나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죄송한 마음. 여행 온 것에 대해서 후회는 없지만, 죄송한 마음은 어떻게 해도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전형적인 경상도 아버지. 그래서 참 표현이 없으셨던 아버지. 연세 탓인지, 멀리 외국에 나가있는 아들 걱정 탓인지 이제는 그러지 않고 감정 표현이 많아지신 아버지 그의 삐뚤한 글씨에, 틀린 맞춤법에 나는 한 없이 죄스러었다.
만나는 누구나 나는 어디서든 살아남을 놈이라며 나를 걱정도 안한다 했지만, 부모 마음은 아직 걸음마를 겨우 떼는 아기의 모습으로 여전히 비치나 보다. 또한, 나는 누군가에게는 멋지고 도전적인 여행자였지만, 아버지에게는 아직 불효자일 뿐이었다. 노트의 여백을 무시한 삐뚤삐뚤한 글씨와 많이 틀려버린 맞춤법에서 아버지의 연세와 그것을 넘어선 사랑이 어렴풋이 나마 느껴졌고, 손님들 몰래 민박집 주방에 앉아 쪼그려 앉아서는 설거지를 하다말고 고무장갑을 낀 채 제법 서럽게 울어버린 하루였다. 한국에 간다면, 만약에 내가 한국에 간다면 아빠의 손을 당당히 잡고 꼭 목욕탕에 가리라....그리고 그 넓디 넓었던 아빠의 등을 밀어드리리라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