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3 -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생기나요?

선배 도전가에게 물었다.

 '가난의 대를 끊겠다'는 생각은 꽤나 좋은 자극이 되었다. 



4~5등급에서 1.7등급! 수능대박이라 선생님들과 친구들이 칭찬했지만 나는 만족 할 수 없었다. SKY를 목표로 했지만, 거기에 닿기에는 성적이 부족했고다. 학과는 '취업하기 좋다.'는 경영학과를 고민없이 바로선택했고, 친인척 하나 없는 서울로 학교를 가기에는 경제적인 문제가 있었고, 학비를 내 손으로 벌기에는 '인서울' 학교의 사립대 학비는 두려웠다. 학비를 집에서 못해주니, 내가 벌면 되는 문제인데, 꽃 같이 자란 5남매의 막내아들은 '돈을 버는 것'이 두려웠다. 20살 동안 집안은 어려웠지만 한번도 '아르바이트'를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이러니 하게도 나는 그렇게 자랐다. 


 그래서 합리적 대안으로 외가친적이 있는 부산의 국립대로 진학을 했고, 대기업 취업율도 서울의 명문 사립대만큼 좋은 학교였고, 여학생들이 정말이지 이뻤다. 그래서인지 학교생활을 정말로 열심히 했다. 대학생활이 인생의 모든 것인 것처럼 성실히 학과 활동했다.  어쩌다 보니 결과적으로 학점은 낮았지만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되었고, 학과의 대표가 되었다그리고 좋은 친구들도 많이 만났고, 여자친구도 만났다. 꽃에 벌이 항상 모이듯, 내 주변에는 항상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장교로 군대에 위해 ROTC가 되었고, 기다려왔던 대기업 취업을 위해서 스펙을 쌓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졸업 전에 '모대기업'에서 고액이 연봉에 추천채용을 권유받기도 했지만, 장교로 전역하면 더 취업 잘하겠지 하는 오만으로 '거절'했다. 


 대학을 단 한 번의 휴학 없이, 제대로 된 방학생활도 없이 '스트레이트'로 졸업을 하고는, 드디어 대한민국의 육군 장교로서 빛나는 임관을 했다. 많은 거창한 이유들이 있었지만, '월급'이라는 이유와 '취업'에 유리하다는 판단으로 지원한 장교임관이었다. 자대는 부산에서 거리상으로 가장 먼 경기도 파주로 발령받았다. 나는 대한민국 끝에서 끝으로 이동했다. 


그러던 어느날!


 꽤나 조용했던 나의 평범했던 시골청년으로서의 인생에 전혀 의도치 않았던 중대한 일이 발생해버렸다. 다른 누구도 아닌, 대학 동기 중에서도 가장 친한 친구와 당시 가장 오랜 기간 교제를 했고, 전역 후 결혼까지 이야기했던  당시의 여자 친구와의 관계가 제법 공공연하게 이상했다. '잘못 된 만남'이라는 노래 가사 그대로 였다. 당사자의 고백으로 소문은 사실로 밝혀졌고, 휴가를 나오자 마자 그녀의 집 앞에 찾아갔고, 저녁 늦게서야 도착한 나는 원룸 문밖으로 새어나오는 '신음소리'에 살인의 충동을 느꼈다. 관계에서 오는 철저한 허무주의와 불안 그리고 분노에 쌓인 시간을 하루하루 쏟아 내고 있었다. 심한 불면증을 앓게 되었고, 하는 수 없이 정상적으로 살기 위해 정신과 진료를 받고는 임시로 수면제 처방을 받았다. 하지만 문제의 원인인 '관계'가 해결되지 않는 이상 '약효'는 없었다. 그 덕에 사랑에 대한 방황이 매 주말 이어졌다. 고향집으로의 휴가는 한번도 가지 않았다.


화려한 복수!를 꿈꾸었다.


내가 생각한 복수는  그 '커플'이 부러워할만한 대기업에 취업하는 것뿐이라 생각했었다. 지금에서 생각하면 지질하기 그지없지만 그것이 진정한 복수라 생각했다. 그 결과로 크고 작은 자격증 7토익 800, 크고 작은 조직의 리더로서 제법 많은 대외활동장교 출신이라는 '스펙들'로  대기업 서류 지원 29 곳그리고 서류합격을 20곳이 붙었다. 부모님 얼굴도 뵙지 않고, 군대업무와 취업준비를 한창 하던 중에 다시 큰일이 터져버렸다


16년을 같이 살아온 매형이 불륜과 사기를 친 것 이었다. 내게 없던 큰 형 같은 존재였고, 나는 심적으로 의지하고 있었다. 시골 집에 돈이 없는데, 집과 땅을 담보로 2억원이 넘는 돈을 빌렸고 외제차를 타며 두 집 살림을 살고 있는 것을 누나들이 발견 한 것이었다. 집안이 완전 발칵 뒤집혔다. 아버지는 다시 쓰러지셨고, 누나는 두딸을 데리고 시골집으로 와있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오랜 기간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가족들이 취업 준비하는 '막내아들' 걱정에, 한참이나 일들이 진행되고 나서야 알렸고, 뒤늦게 모든 것들을 나는 그저 있는 그대로 분노도 없이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한 의욕의 상실. 


 왜 취업을 해야할까? 왜 돈을 벌어야 할까? 아니, 왜 살아야 할까? 


하는 근본적인 질문들이 내 머리 속에서 점점 자라났다. 가족, 부모님을 위해서, 여자친구에 대한 복수로 '취업'을 생각했지만, 막상 사건들이 터지고 나니 어떻게 해야할지 몰랐다. '어떻게 취업을 잘하는가?' '어떻게 자소서를 잘쓰는가?' 등에 대한 코칭은 많이 받았어도, 왜 살아야 하는지 한번도 고민해 본적이 없었다. 


'허무주의'  취업해서 뭐해? 결혼해서 뭐해? 어차피 사람은 다 죽는데 꼭 살아야하나?  우리부대 관심병사들이 '자살'을 하고 싶다고 상담할 때, 나는 어디서 목을 멜까? 숙소 바로 앞 은행나무에서 목을 메면 잘보이겠지? 

생각을 하는 나를 보는 순간. 왜 나한테만 이런 일들이 한번에 일어나지? 나는 열심히 살려고만 했을 뿐인데 

말이다. 사는게 너무나 억울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2 - 취업이 꿈인 삶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