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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즐기자! 이게 인생이지!

방황 아니면 방탕

아무도 나를 모를 것이라는 기대감. 


난생처음 비행기를 예약해본 터라, 아무렇게나 예매를 했고, 인천에서 더블린까지 30시간이나 걸려서 도착했다. 부모님은 간절히 내가 한국에서 다시 취업하기를 바라셨지만, 그토록 원하던 회사의 면접도 포기했다는 사실과 '총기 없는 내 눈'을 보시고는 너무 늙기 전에 돌아오라며 더 잡지 못하셨다.  


 

나는 더블린에 있었다.

아일랜드. 이 곳 사람들은내가 어떤 마음인지, 어떤 과거를 가졌는지 아무도 나에 대해 몰랐다. 그래서 가능하다면 해외취업이라도 해버린다면 해외에서 살 생각까지도 있었다. 아무튼 꽤 희망적이었고 그렇게 순식간에 적응해 버렸다.  첫 유학생활이었지만 나는 하나도 서툴지 않았다. 한국을 떠나고 싶은 마음의 반작용으로 외국에서의 생활이 더욱 간절했다. 거기다가 또 이상한 자신감 같은 게 있었다. 나는 일반 유학생들과 다를 것이다. 꽤 영어도 하고, 이미 한국의 기업들에서 합격소식을 받았지 않았던가? 그래서 노란 머리 백인들과 정장을 입고, 자유로운 분위기의 사무실에서 토론하며 스포츠카를 타고 출퇴근하는 그런 상상을 했다. 뭐 그냥 그럴 수 있을 줄 알았다. 사실 내 자신감의 근원은 1500만 원이 넘는 통장 잔고였다. 세상 어디에서 생존해야 하던 이 돈이라면, 정말이지 식은 죽이라도 먹듯 문제없어 보였다.



1500만 원,  퇴직금 400만 원, 그리고 마지막 달 월급 100만 원, 그리고 친구에게 빌린 돈 400만 원, 그리고 보험을 해약하고 받은 돈 700만 원에서 학자금 100만 원을 갚고 남은 돈 1500만 원이었다. 보험은 내가 30년간 돈을 쉬지 않고 벌겠다는 강한 의지였다. 내가 선택한 취업에 대한 물러날 수 없는 나름의 '배수의 진'이었다. 그렇게 원금에서 300만 원을 손해를 보면서 해약을 했고, 나는 아일랜드에서의 삶을 시작했다. 


 매일 같이 외식을 했고, 돈을 아껴야 한다는 생각과 공부를 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동안  혹사당한 청춘에 대한 사죄의 의미로 나에게 방종이라는 것을 좀 주고 싶었다. 정말 마음 놓고 놀았다. 유럽의 클럽이 좋았고, 음악에 누구나 친구가 되는 금발의 미녀들과의 시간이 좋았다. 이른 오후부터 특유의 유쾌한 기네스 맥주 향이 팍팍 나는 아이리쉬 펍들이 좋았다. 더블린 현지인 친구들과 학원에서 만난 인연들과 노는 게 너무 좋았다. 그렇게 더블린에 있는 모든 클럽은 다 보려 했고, 모든 술은 다 마셔보고 싶었다. 거기에 더해 유로에 대한 개념도 없었다. 10유로가 그냥 10유로로 다가왔지 1만 5천 원으로 다가오지 않았으니 말이다. 아낀다고 아껴먹고, 셰어 룸도 쓰고, 나름 적당히 논다고 놀았는데, 그것은 상대적이었던 모양이다. 특히, 만나던 여자들에게 돈을 많이 썼다.  


여자들 앞에서 폼안나게  동전을 받는 일들이 귀찮았다. 그런 귀찮음을 자랑처럼 말하고 다녔고 쿨하게 여성친구들에게 호의를 베풀고 다녔다.  잔액을 확인하지 않으니 얼마나 썼는지 제대로 알지 못 했다. 굳이 공인인증서를 로그인하며, 잔액을 하는 그런 사치에 가까운 수고스러움을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충분한 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아일랜드로 입국한 지 한 달하고도 보름이 지나서 카드 사용이 정지되었다. 


'잔액부족' 그때서야 말도 안된다며 잔고를 확인했다. 3개의 통장 잔액의 합이 900원. 심장이 순간 멈추는 듯했다.  그렇게 나는 벼랑끝에 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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