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그렇게 하니까
탈시골을 목표로 하니, 자연스럽게 '신문물'에 관심이 많이갔다. 10대, 다들 그러했을 시기였다. 스타크래프트와 디아블로에 미쳐있었고, 몇 천원에 다른 세상을 맛 보는 게임이 그렇게 좋았다. 집에는 독서실을 다닌다고 말하고 매일같이 PC방을 다니는 행복한 학창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PC방에서 집으로 돌아와보니 부모님이 계서야할 집에 아무도 없었다. 아버지가 갑작스레 중풍(뇌졸중)으로 화장실에서 쓰러지셨고 병원에 입원하셨다. 한 겨울에 보일러 비 아끼려다 난방을 안틀어서 그런 일이 있었다 들었다. 공부하는 아들 방은 한번도 추웠던 적이 없었다. 가장인 아버지가 아프셨고, 집에 빚이 몇 천만원에서 몇 억으로 더 늘어났다. 아픈 아버지 때문에 어머니는 병수발과 농사일을 혼자하셔야 했다. 집의 상황을 나도 알고 있었다. 정상적이라면 공부를 더 열심히 하던가, 아르바이트라도 하면서 집에 보탬이 되어야 했지만 '귀한 아들'로 자란 탓에 그럴 용기는 없었고, 다만, 이러저리 나쁜 짓을 하며 방황하기 보다는 게임에만 집중하는 것으로 방항을 대신했다. 나는 나쁜 짓을 하는 그럴 배짱도 없었다. 누구나 꿈꾸는 청소년기의 멋진 일탈 대신에, 시간이 지나면 결국엔 화려해지는 사이버상의 세계가 그것이 유일한 나의 도피처가 되었다.
내가 게임에 빠져있을 때, 어머니는 밤에는 아버지 병수발을 드시고, 낮에는 시내에 있는 중앙시장에 나가서 그 해 지어 놓았던 토마토를 커다란 고무대야에 가득 싣고 가서 팔아서 생활비를 벌고 있었다. 나는 새벽같이 나가시는 어머니를 진즉에 알았지만 애써 무시했었다. 인정해버린다면 너무나 큰 것을 내가 짊어져야함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상황을 인정하는 것 대신에 공부한다 말하고 PC방에 가서 게임에 더 집중하는 것을 택했다. 아마도 게임에는 가난이 없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런 어머니의 모습이 게임에는 없었기 때문이었을까? 그렇게 한창 게임에 빠져있고, 제법 레벨이 올랐을 무렵 첫사랑인지 짝사랑인지 모를 감정에 같은 버스를 타는 동갑내기 여학생을 좋아하게 되었다. 나는 현실을 무시했지만, 집에 빚은 더 늘어갔고, 고무대야의 무게 때문에 어머니의 허리도 더 굽어져만 갔다.
우연히 집으로 가는 막차 버스를 타고 집에 가는데, 장에서 돌아오시는 어머니를 보았다. 못 본척 했다. 여학생들이 많이 탄 버스라 어머니의 행색이 부끄러웠다. 어머니는 시내버스 기사 아저씨를 한참이나 멈춰 세워놓고는, 팔다 남은 토마토가 가득 담긴, 낡아서 하얗게 색까지 바란 빨간 고무대야를 다른 학생들의 도움을 받아 싣고 계셨다. 자리를 찾으려 대야를 스윽 밀며 오시던 어머니와 눈이 마주쳤고 애써 못 본 척 했지만 나는 알았다. 어머니도 나를 보았지만 모른 척 해주신걸 알았다. 축처진 알록달록 몸빼바지에 화려한 꽃무늬 티셔츠에 돈도 얼마 없어보이는 낡아빠진 전대가방 그리고 빨간대야, 모를 수 없는 어머니의 모습 대로 였다. 한참이나 어색하지만 어색하지 않은 분위기 속에서 나는 여학생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어머니는 혹시라도 토마토가 흔들리는 버스에 떨어질까 대야를 발에 끼고 쪼그려 앉아서 가고 계셨다. 한참이나 갔을까? 멈추지 말았으면 했던 버스는 야속하게도 우리 마을에 정차했고, 어머니 혼자서 또 무거운 대야를 내리고 계셨다. 또 다시 다른 학생들이 도와주어 겨우 버스에서 내렸고 나는 뒤늦게, 애써 아무것도 모르는 척 태연히 내렸다.
내리고서도 어머니와 나는 한동안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마치 모르는 사람 마냥 그렇게 버스가 가기를 기다리고, 저기 멀리 버스가 고개로 사라지자 나는 어머니께 화를 냈다. '왜 하필 이 버스를 타서 쪽팔리게 했냐'고 말이다. 어머니는 아무 말이 없으셨고, 대꾸 대신에 그날 토마토를 팔아 버신 오천원짜리 몇개를 손에 쥐어주셨다.
나는 죽을 만큼 부끄러웠다. 며칠인지 몇 주인지 용돈을 못 줘서 미안하다며, 몸빼바지 안쪽 주머니에서 꾸깃한 돈을 욕을 하는 내게 건내는 어머니의 미안한 표정을 보았다. 집으로 혼자 달렸다. 아, 순간 욕이 나왔다. 그런 줄도 모르고 애써 모르는 척, 반대편으로 돌렸던 나를 향해 뜨거운 육두문자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곤 이불을 뒤집어쓰고 한참이나 울었다. 아마도 나는 그때 태어나서 가장 많은 눈물을 흘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찢어지게 가난한 것도 아니었지만, 내게만 주어진 것 같은 죄 같은 가난이 부끄러웠다. 어쩌면 그냥 또래 부모님에 비해 훨씬 나이 들고, 농사짓는 부모님이 부끄러웠는지도 모른다. 빚이 몇 억이 될 만큼 많았지만 가끔 사랑의 리퀘스트에 삼천원짜리 기부 전화정도는 하고, 밥도 굶어 본적은 없었는데, 좋은 자가용을 타고 정장을 입고 다니는 다른 친구들 부모님에 비해서, 우리 부모님이 단지 조금 부끄러웠다. 그래서 가난의 대를 끊자는 미션을 스스로에게 부여했다. 아니, 우리 가족 모두의 평생의 미션이었다. 그 미션은 누나들과 항상 이야기하던 문제였다.
'눈물의 날' 이후부터 상황을 환경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가족 문제가 정말이지 당장에 내 등위에 돌덩이라도 있는 것 처럼 가깝게 다가왔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하는지, 어떻게 그 돌덩이를 가볍게 하는지에 대한 방법을 몰랐다. 세상 물정모르는 일개 '고딩'으로서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어쩔수 없이 가장 쉬운 선택이었던게 아마 공부였던 것 같다. 내가 아는 개천에서 용 나기 가장 쉬운 방법이라 생각했었다. 장사를 하거나 학생으로서 일을 하기에는 그만한 배짱이 없었다. 대신에 공부를 제대로 시작했다. 그래도 '게임중독'에서 벗어나기 몇년의 시간이 필요했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 공부하기로 진짜 마음 잡았을 때가 고등학교 3학년으로 올라가던 때 였다. 그렇게 내 모든 에너지와 의지는 '경쟁'에서 이겨서 좋은 곳에 취업하는 것을 위해서 쏟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