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계단

by 홀연

백지로 올라가는 계단은 항상 힘들었다. 가도 가도 끝이 없었고, 숨이 턱까지 차올라 힘들었다. 구두를 신은 발은 일을 할 때보다 계단을 올라갈 때 더 아팠다. 차라리 계단이 길게 쭉 나열되어있으면 끝이라도 가늠할 수 있으련만, 그 계단은 9개의 계단이 최소 6번은 반복해서 지그재그로 나열되어 있었다. 항상 이 계단이 몇개인지 세어보다가 잊어먹기를 반복했다.

그 계단을 올라가는 일이 A와 사귀는 일 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올라도 올라도 끝이 나오지 않는, 끝인가 하고 생각들다가도 다시 계단이 나와 나를 지치게 하는, 그런 계단.


그 계단을 따라 A의 장점을 말해보았다. 한 단의 계단을 메울만큼 많았다.

그의 단점을 말해보았다. 무심하다, 무심하다, 무심하다, 무심하다 .... 같은 말이 계단을 계속 채웠다.

아홉개가 좋아도 하나가 치명적인 단점이라면, 그것을 감수할 수가 있을까? 나는 그런 의문을 품는 것조차 싫었지만 계속해서 드는 의문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23살, 4학년 1학기. 충분히 바쁠만한 시기였고 나는 남들만큼 바빴다. 나는 하나에 신경쓰면 다른 것에 많은 신경을 쓰지못하는 타입이었다. 그래서 나와 A는 여느 연인들과는 달랐지만, 그래도 나는 괜찮았다. 하지만 학기가 끝나고, 여유가 생기자 나는 A에대해, 그리고 나와 A의 관계에대해 생각해보는 일이 잦아졌다. 그럴수록 나는 지쳐갔다.

A는 멋진 사람이었다. 어떻게 이런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내게는 너무 멋진 사람이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A가 별로라고 했다. 내가 친구들의 연애에 참견할때 내뱉던, 그렇게 왜 사귀어? 그 사람은 왜그래? 그냥 헤어져, 라는 말을 내가 듣곤 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같은 말을 하는 것은 타당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그 입장이 되자 아닐 것이라고, 사람들은 모든 측면을 보지 못하니 그렇게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는 내 일에는 바보가 되어버리곤 말았다.


이렇게 사귀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라는 생각이 몇일에 한번에서 하루에 한번으로, 몇시간의 한번에서 한 시간에 한번으로 잦아질때쯤 그와 정반대인 B와 친해지게 되었다. 나는 혼란스러워졌다. A와 B를 비교 해보는 내가 싫었다. 그 무엇보다도 내가 A를 좋아했기때문에 용납되었던 것들이 점차 용납되지 않아졌다. A의 말을 점점 이해하고 싶어지지 않아졌다. A의 이야기가 틀렸다고 꼽씹어보는 일이 잦아졌다. A의 그 말에 이렇게 반박했어야했는데, 하고 생각하는 것이 늘어났다. 다음번 연애는 이렇게 하지 않으리라, 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 * *


유난히 기억이 선명한 그 날, A와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연스래 이야기는 책에 관한 것으로 흘러갔다. A는 내게 '달과 6펜스'라는 책이 인상깊었노라 말했다. A는 이 책의 스토리를 이야기해주었다. 책에서 남편이 가족을 버리고 갑자기 떠난다. 부인과 다른 사람들은 남편이 바람이 나서 떠났다고 했지만, 주인공이 알아본 결과 남편은 그림을 그리기위해 가족들을 버리고 국외로 떠난 것이었다. 그 사실을 알게되자 부인은 차라리 사람들에게는 남편이 바람났다고 말해달라고 했다며, 여자들은 참 타인의 시선을 많이 신경쓰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리고 곧 A는 내게 물었다. 너도 그렇게 타인의 시선과 말들을 많이 신경쓰느냐고.

나는 무슨 대답을 해야 '정답'일 줄 몰라 망설이다 모른다고 대답했다. A는 내게 모르는 게 뭐 그리 많느냐고 핀잔을 주었다. 사실 나는 타인의 말에 쉽게 흔들리는 타입이었다. 나 스스로 나를 팔랑귀라고 묘사하곤 했다. 하지만 내가 하는 말들이 모두 A에게 정답이길 바라던 시간이었기에 나는 더 나은 대답을 찾을 수 없어 그저 웃고 말았다. 그럼 당신은 어떠냐는 나의 질문에 A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나는 내가 본 것만 믿는다고. 내가 직접 보고 경험한 것이 아닌 남들에게 전해들은 말들은 믿지 않노라고. A의 그 말에, 그의 지난 페이지를 넘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전까지 가지고 있던 생각은 이것이었다. 사람은 객관적일 수 없고 주관적이기에, 아무리 자신이 맞다고 생각해도 대부분의 사람이 모두 다른 의견을 말한다면 그것에는 이유가 있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상황은 여러가지 측면이 있기에 타인에게 아무리 잘 묘사한다고해도 그 전달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고, 그렇기에 그 말을 전해들은 타인들이 판단하는 것은 단편적인 모습일 수 밖에 없기에 백프로 옳을 수는 없다는 것. 두가지 상황이 상반되어 보이지만 두가지 다 맞는 말 같다.

내 나름대로의 기준을 세우고 타인들의 의견을 들어는 보되 백프로 수용하지는 않고 취할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려야하지 않을까. 나는 내 스스로가 그렇게 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실상은 아니었다. 나는 그 누구보다도 타인의 말에 잘 흔들리는 사람이었다. 지금도 아마 그럴지 모른다.

그렇게 나는 점점 흔들렸다. 타인의 말에 흔들린 내 탓도 있었지만, A 역시 나에게 타인임은 마찬가지였다. 나는 나 스스로의 생각을 정립하기가 힘들었다. 내가 일반적인 여자여서 싫다고 생각했던 내가 A가 일반적인 남자가 아니어서 싫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A가 못나보여 나 스스로 당황스러웠던 날이 생기고, A의 연락을 기다리지 않는 날들이 늘어나고, A의 메세지를 무시하고 B와 연락을 주고 받고, 연락이 되지않는 A때문에 짜증이나 휴일에 A가 아닌 B를 만나러 나갔다. 모든 것에 A가 잘못이라며 나의 행동을 정당화했다.


휴무가 끝나고 출근을 한 다음날 조회시간, 나는 다른 날보다 유독 덥다고 생각했다. 이마에 송글송글 땀이 나고, 등으로 땀이 흘러내렸다. 점차 머리가 아파왔다. 머리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어지러워졌다. 내가 손을 들며 어지러워요, 하는 순간 나는 비틀거렸다. 관리자의 놀란 얼굴이 보였다. 관리자는 나를 부축해 휴게실로 갔다. 휴게실에 누워있으니 곧 정신이 말짱해졌다. 그래도 의무실에 가서 좀 누워있다가 괜찮아지면 근무에 투입하고 힘들면 조퇴하라는 말에 나는 의무실에 누웠다.

-나, 쓰러질 뻔했어요. 무서워요.

A는 전날 밤부터 나의 카톡을 읽지 않았다. 아무리 연락을 안하던 A였지만 꼬박꼬박 아침인사는 하던 A는 그날따라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나는 받지않을 A에게 전화를 걸 수도 없었다. A가 내 전화를 받지않음을 알고 있었다. 내가 그 메세지를 보내고 난 6시간동안 A는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연락이 닿고 그를 만난지 6시간 뒤, 나는 A와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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