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좋았다. 일어나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늘 그렇듯이 휴대폰을 바라보는 일이었다. A에게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그래, 이래야지. 이러는게 맞는 거겠지.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슬퍼졌다. 집에 계속 있고 싶었지만 꼭 병원에 다녀오라던 A의 말이 생각나서 나는 집으로 나갈 준비를 했다. 어차피 집 앞 동네니까 쌩얼에 대충 입고 나가려다가 나는 원피스를 꺼내 입었다. 내가 좋아하는 노란색 롱 원피스를 입고 화장을 하니 꼭 어딘가를 가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병원으로 향했다.
날씨가 무척 좋았다. 일을 할 때는 햇빛이 절정인 2시에서 4시 사이와 그 후 노을이 질 시간에는 지상으로 올라가서 일을 하는 것을 꺼려했다. 하지만 일을 하지 않으니 햇빛이 따스하게 느껴졌다. 이어폰을 끼고 천천히 걸었다. 내 원피스 자락이 바람에 흩날려 발목을 간지럽혔다. 전날에는 그와 함께 갔던 곳을 혼자서 가구나, 하는 바보 같고 미련이 줄줄 흐르는 것 같은 감상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믿을 수 없게도 기분이 좋았다. 꼭 A와 사귀었던 다음날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옅은 바람에 흩날리는 나무 소리에도 기분이 좋아지던, 날씨가 끝내주게 좋았던, 실감이 나지 않던, 그 날. 이상하게도 나는 여전히 A가 좋았다. 하지만 A와 헤어졌다는 사실도 좋았다. 그것은 내가 A와 사귀는 시간이 힘들었었다는 것의 반증이었을까?
지난밤 A와 했던 이야기를 돌이켜 보았다. 그때는 A의 모든 말들이 진짜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니 A의 그 말들이 거짓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내 이런 생각이 들었다. A의 모든 말들이 거짓이었더라도 나는 상관없다고. 그 순간 A와는 상관없이 내가 진짜였고 진심이었기 때문에 모두 괜찮다고. 그리고 나는 그 시간 동안 그 무엇보다 A를 좋아하던 내가 좋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병원과 한의원에 들렀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밖은 밝았지만 햇빛이 들지 않는 우리 집은 어두웠다. 몸이 괜찮아지자 집안일을 하고 싶었다. 집을 청소하고, 쌀을 씻었다. 쌀을 다 씻고, 전기밥솥에 틀을 끼웠다. 그만 손이 미끄러져 씻어놓은 쌀이 밥솥 안으로 들어갔다. 쌀알과 물이 밥솥 본체로 들어가고, 그 밑의 구멍으로 다시 쌀알과 물이 바닥으로 세어나왔다. 부엌이 물과 쌀알로 흥건해졌다. 나는 얼른 행주로 부엌을 닦았지만 잘 닦여지지 않았다. 그것보다 밥솥으로 들어간 쌀알이 문제였다. 밥솥을 흔들어보니 쌀알이 나왔다. 계속 흔들자 쌀알은 나오지 않고 소리만 들렸다. 분명 이대로 취사를 하면 밥솥이 고장 날 터였다. 다 닦았던 부엌 바닥이 쌀알로 뒤범벅된 모습과 밥솥을 흔들고 있는 내 모습이 너무 바보 같았다. 일은 고되고, 쓰러질 뻔하고, 아프고, 응급실에 갔다가, 남자친구와 헤어진 것에 모자라 밥솥까지. 이게 무슨 악재인가 싶었다. 내 모습이 서러워 나는 엉엉 울었다.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내 모습이 내 시점이 아닌 먼 시점으로 내가 보였다. 지난 며칠 간 내게 일어난 일이 갑자기 너무 희극적으로 느껴졌다. A와 헤어질 때도 웃으면서 한 말이었다. 이게 뭐냐고, 우리의 상황은 완전히 코미디라고. 특히 밥솥 때문에 울고 있는 내 모습이 정말 희극적이었다. 그리고 이 말이 떠올랐다. 나는 눈물을 닦고 까르르 웃었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 * *
전화번호부의 A의 이름을 본명으로 바꾸었다. 낯선 이름이었다. A와 사귀기 전에도, 사귀던 중에도 그 이름으로, 거기다 성까지 붙여 부를 일은 거의 없었다. 이 이름이 칭하는 이가 내가 아는 A가 맞는 것일까? 이름이 낯설게 느껴지자 그 또한 낯설게 느껴졌다. 내가 아는 A가 A의 진짜 모습이 맞았을까? 왠지 A는 내게 자신의 모습을 모두 보여주지 않는다는 낯선 느낌이 가끔씩 들곤 했다. 무언가 벽이 있는 듯한 그런 느낌. 나는 낯선 그 이름을 빤히 바라보다가 전화번호부에서 A를 지웠다.
카카오톡에는 친구로 남아있었다. 그것마저 지우려다 놔두었다. 여전히 프로필 사진도, 알림말도 없는 A였다. 나는 A를 즐겨 찾는 친구에서 해제했다. A와의 대화목록을 삭제했다.
짧았던 추억만큼 정리할 것이 많지 않았다, 다행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