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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커리어 아티스트 Feb 20. 2021

후드티와 정장 사이

학생들이 너무 부러웠던 그때 그 시절


오랜만에 싱가포르 정착 초창기에 살던 동네를 지나게 되었다. 그 때는 주변에 허허벌판이었는데, 이제는 새롭게 지어진 건물들도 많이 보이고, 큰 쇼핑몰도 근처에 생기고, 작은 오피스 타운이 되어서 이 동네에 내가 살았던 적이 있었던가라고 생각될만큼 새삼 세월의 흐름이 느껴졌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직장 다니던 첫 해였다. 한창 해외 생활과 회사생활에 적응하느라 바빴을무렵, 지인 언니가 NUS 싱가포르 국립대학교에서 풀타임으로 석사과정을 하셨다.


난 그때 직장을 다니며 회사일을 하느라 바빴지만 학생 신분이었던 언니가 어찌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대학을 졸업한지 얼마되지 않긴 했지만, 사회에 나와서 만나게 된 사람들, 동료나 고객들 포함해서 대단한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그들을 바라보며 나는 아직 부족하다고 느껴졌고, 뭔가 더 배우고 싶고 채우고 싶다고 생각했다.


회사일이 끝나고 종종 언니를 만나러 대학캠퍼스를 놀러가곤 했다. 시내 금융가의 고층건물이 아닌, 푸릇푸릇하고 넓직한 학교로 향하던 그 길이 얼마나 설레던지...퇴근길엔 하루를 마감하고 피곤한 경우가 많았지만, 언니를 만나러 가는 길은 에너지가 넘치는 것 마냥 기대되는 시간이었다.


싱가포르 국립대를 가려면 부오나비스타 지하철역에서 내려서 버스를 타면 되는데 대학생들 사이에서 버스정류장에서 기다리는 동안에도 후드티를 입고 저마다 밝은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던 자유분방한 그 학생들만의 분위기가 좋았다. 싱가포르 국립대 근처에는 주변에 유명한 경영대학원인 INSEAD, ESSEC 같은 곳있어서 이렇게 학교들이 모여있는 그 특유의 젊고 활기찬 분위기가 있었다. 많은 학생들 사이에서 어색한 정장차림으로 서있던 나는 언젠간 다시 꼭 학생신분으로 돌아가고 싶단 의지에 불타올랐다.


싱가포르 국립대 캠퍼스는 넓기도 하고 언덕도 많아서 버스를 타고도 각 단과대학 건물 사이 거리도 길고 멀었다. 버스를 타고 지나가면서 드디어 언니가 공부하던 건물에서 내렸을때, 후드티를 입고 두꺼운 전공책을 갖고 도서관 앞에서 만나던 언니와 나의 정장차림은 극과 극이었다.


언니랑 학생회관 휴게실같은 곳에 앉아서 커피랑 브라우니를 시켜놓고 한참 미래에 대한 수다를 떨던 그 시간이 아직도 생생하다. 언니는 얼른 졸업하고 직장다니고 싶다고, 공부 좀 그만하고 돈을 벌고 싶다고 하셨다. 그런 언니에게 오히려 나는 얼른 다시 학생이 되고싶다고 하며 우리는 서로를 부러워했다. 그러면서 학교 이야기, 직장이야기 그리고 앞으로 하고싶은 미래계획에 대해 늦게까지 수다 삼매경에 빠졌다.


당시에는 알던 지인이 별로 없었기에 한국어로 수다를 할수있는 그 시간이 유일했고, 그랬기에 더없이 소중했다. 시간이 흘러서 언니는 졸업 후에 싱가포르에서 취업하고 나중에는 홍콩으로 이직을 했고, 난 10년후 그토록 바라던 절반 학생신분으로 (파트타임이었으므로) 복귀했다.


돌이켜보면 그때 그 시절도 있었지 라는 생각이 들 때가 종종 있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성장해오던 내 모습에 수고했다고 토닥여주고 싶기도 하다. 회사일이 끝나고 나면 졸린 눈을 부릅뜨고 다시 학생이 되는 날을 꿈꾸며 토플책과 지맷책을 붙잡고 있던 그때의 내 모습이 있었다. 당장은 너무 비싸다고 느껴지던 학비, 그리고 어렵게만 느껴지던 시험 과정들이 내 앞을 높이 가로막고 있었고 그래서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과, 다 늦게 공부를 하고싶은건 역시 무모한걸까, 시간과 비용을 아낄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을까란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종종 언니와 만나면서, 다시 학생이 되고싶다는 희망을, 그리고 용기를 조금씩 가질수 있었다. 그 때 내가 할 수 있는 환경내에서 가능한 준비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퇴근 후 피곤이 쌓인 시간에도 책상에 앉아서 시험공부를 하던 노력이 내가 당시에 할수 있었던 준비였다. 과연 학비를 마련하고 시험점수를 만들어놓는 그 시간이 나에게 올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들었고, 멀게만 느껴지던 목표였지만,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일단 오늘 하루 내가 할수 있는 것에만 집중하자고 생각했다. 직장 초년생이라 모아놓은 돈도 없고, 외계어 같았던 지맷 책을 보면서 좌절하기도 했지만, 꿈이 있었기에 빛나던 시간들이었다.


그 때처럼 뭔가 간절한 목표를 향해 열중하던 내 모습이 그리워지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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