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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과 삶의 경계가 흐릿해지더라도

그동안 몰랐던 나의 모습

by 커리어 아티스트

매일같이 구인공고들을 훑어보면서 한숨을 쉬던 시절이 있었다.


예전 회사에서 내가 있던 부서가 조만간 전략상 인도로 옮겨진다는 부서장님의 발표가 있었던 날 이후, 매일처럼 불면증에 시달렸다. 야근하고 고생하면서 일했던 시간, 보람은 그냥 그렇게 아무 의미 없이 흩어져버린 건가. 앞으로의 비전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일하는 동기부여를 어떻게 받아야 할까. 처음으로 멘탈붕괴를 겪었다.


물론 당장 회사를 퇴사할 필요는 없다고, 다른 부서로 이동하면 된다고 했지만, 보장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더 많은 성장과 새로운 도전을 꿈꾸면서 이직한 직장이었는데, 허탈감, 상실감이 짙게 다가왔다. 항상 도전만을 최우선 가치로 삼아오던 나로서는 직업 선택 기준의 우선순위가 변하게 되는 계기였다. 그래서 그 당시 넥스트 스텝으로 선택하고 싶었던 직업의 기준은 바로 "안정성"이었다. 갑자기 회사 전략상 부서 전체가 날아가지 않는, 마음 편하게 오랫동안 일할수 있는 그런 일터였다.


그리고 몇 년 뒤, 또 다른 도전 앞에서 망설이고 있다. 이번엔 내가 지원한 것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제안을 받은 케이스지만, 나의 선택으로 인해 또다시 변화를 겪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예전의 마음고생하던 20대 시절의 내 모습이 생각나서 더욱 이번 선택이 어렵게 느껴진다. 면접을 보면서, 새로운 분야에 대해서 혼자서 탐색해보니, 알면 알수록 미래의 가능성이 굉장히 높은 곳이고, 앞으로 비전이 무궁무진한 흥미로운 분야인 것 같아서 점점 관심이 높아진다. 그런데 전통산업이라기보다는 새롭게 떠오르는 곳이라서, 가능성이 많은 곳이라는 건 알지만 너무 새로운 분야이기에 아무도 미래를 보장해주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흔히들 좋아하는 일을 해야지만 성공한다고들 한다. 좋아하는 일을 해야지만 열정의 온도를 유지할 수 있기에 일을 즐기면서 할 수 있고, 또 그러다 보면 성공을 하기도 수월해진다고 말이다. 나 역시 이 말에 공감했었다. 그래서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눈에 불을 켜고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관심사가 다양하고 호기심이 많아서 좋아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 계속해서 변하고 진화한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일이라고 해도 계속하다 보면 싫증이 나기도 했고,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일이 의외로 나의 적성에 맞는 듯 편안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도전" 이라는 키워드는 그동안 커리어를 키워오는 데 있어서 중심을 두고 생각했던 가치였기에 다른 업종에서의 제안도 충분히 시도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몇 년 전 직업의 우선가치의 변동을 겪었던 터라, 굉장히 조심스럽다. 면접을 진행하면 할수록, 새로운 기회의 문 앞에서 주저하는 마음을 제3자의 시각으로 바라보면서 스스로가 낯설게 느껴진다. 지난주에는 나도 왠지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주 면접에서는 이 분야가 과연 나에게 맞는 옷일까란 생각이 처음 들었다.


이 분야는 24시간 내내 돌아가는 분야라서 사실 상 하루 종일 매여있어도 좋은 열정

아직 초기단계라 체계가 잘 안 잡혀있어서 맨땅에 헤딩해도 좋을 만큼의 끓어오르는 열정

어려운 상품 내용이지만 스스로 연구하고 충분히 파고들고 싶을 만큼 배움에 대한 열정


내용만 들어봐도 뭔가 젊음의 에너지가 끓어오르는 듯한 뜨거움이 느껴졌다. 예전의 나였다면 이렇게 불처럼 뜨거운 열정에 매료되고 도전을 사랑하는 직업인으로 바람직하고 지향해야 하는 모습이라고 생각했을 텐데 지금은 마치 그 뜨거운 불이 좋아 보이기보다는 어쩌면 데일 지도 모르겠다는 망설임이 있다. 경력이 오랫동안 쌓여버려서, 이미 내 분야에서 안정적으로 지내고 있어서 그런 걸까, 설렘보다는 주저함이 느껴졌다.


커리어에서의 우선순위가 나에겐 배움과 성장이기도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일과 삶의 균형도 나에겐 중요한 가치였구나 란 사실을 깨닫고 있다. 물론 지금 있는 분야도 새벽이나 밤늦게 일해야 할 때도 있고 안정성이라는 측면으로 보면 아무것도 보장되는 것이 없지만 적어도 24시간 동안 일을 생각해야 한다는 무게감과 부담감이 새로운 분야보다는 덜하기 때문이다.


일과 삶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으려면 정말 이 분야에 올인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잘 모르는 분야이기에 그 확신이 내 안에 있을지 아직도 알아가는 중이다. 면접을 많이 보는 것이 예전에는 부담이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잘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할수록 이 분야에 대해서 더 많이 알아가고, 내가 가고자 하는 길에 대해서 확신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아직도 나의 마음속 신호등은 초록색과 빨간색 사이 노란색 그 언저리에서 주저하고 있는 중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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