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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 영역을 확대할 때 필요한 것

자꾸만 작아지려는 마음을 다독이기

by 커리어 아티스트
Fast Learner (빨리 배우는 사람)


나를 표현하는 단어 그릇들을 생각할 때마다 매번 빠지지 않고 등장하던 말이었다. 프로이직러로 불릴 만큼 잦은 이직을 겪으면서 항상 다른 직무로 이동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빠른 시간 내로 성과를 냈기 때문이다. 무미건조하게 반복되는 단순한 일보다는 다소 힘들더라도 새로운 일에 매력을 많이 느끼는 터라 변화를 겪더라도 웬만하면 단기간 내로 적응하곤 했다.


그런데 요즘 들어 나의 속도가 예전 같지 않다. 마음으로는 탁 트인 고속도로에서 최대 속도로 신나게 질주하고 싶지만, 현실은 꽉 막힌 고속도로에서 엉금엉금 기어가는 듯한 느낌이다. 업종까지 바꾸고 나니 다른 차원의 속도가 필요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백투백 미팅의 연속인 와중에 이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겠는 데와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의 답답함 사이의 오간다.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서 서서히 윤곽이 보이는 것 같은 희망이 생기다가도 이내 어두컴컴한 암흑이 나를 삼키는 것 같다.


커리어 피봇팅이란 역시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비슷한 프로필의 거래처를 상대하던 예전과는 달리 상대방의 업종까지 너무 다양해졌기 때문에 매번 초보자라는 기분이 든다. 너무 급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돼 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마음을 챙겨주기 전, 이 정도밖에 안되나라는 쪼그라들고 초라해지는 마음이 불쑥불쑥 새치기를 한다. 아무리 다른 업계에서 오긴 했지만 경력이 이미 길게 쌓인 상황에서 스스로에게 기대하는 기대치가 높은 것 같다. 함께 일하는 동료와 점심을 먹었는데 요즘 그녀는 불면증이 생겼다고 했다. 회사에서 일하는 office hour가 끝나고 나서도 하루 종일 일 생각을 멈출 수가 없다고, 마치 꺼지지 않는 컴퓨터 마냥 무의식 중에서도 계속해서 일 생각을 한다는 그녀의 말에 나 역시 공감했다.


그렇게 고군분투하던 한 달이 지났고, 어제 새로운 대형 프로젝트 기회를 발굴했다. 물론 처음에는 과연 이게 될까라는 물음표가 있긴 했지만 마치 맨땅에 헤딩하듯이 무작정 용감하게 시도해 본 것이었다. 테크니컬 한 용어들을 잔뜩 담은 있어 보이는 피칭도 아니었고, 아주 쉬운 말들로 내가 자신 있는 한도에서만 제안한 것이었는데 결과가 괜찮아서 의외였다. 무엇보다 회사에서 시킨 것도 아니고 누군가의 도움 없이 오로지 나 혼자만의 힘으로 해낸 일이었기에 뿌듯했다. 물론 아직 딜 클로징까지는 한참 남았지만 그래도 조금씩 나의 영역을 확대해가는 것, 알에서 깨고 나오는 과정 중에 좋은 시작이라고 의미를 두고 싶다.


저녁에 오랜만에 MBA 동기에게 연락이 왔다. 그녀는 한 회사에서만 줄곧 다녀왔는데, 나의 최근 소식을 듣고 안부 연락을 해왔다. 전통적인 업계에서 벗어나서 전혀 다른 세상의 경험이 어떤지 궁금하다고, 본인은 MBA 이후 번아웃을 겪어서 다른 것에 도전하는 것이 엄두가 안 난다고, 지치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하는 열정은 어디서부터 오는 것이냐고 물었다. 그녀의 질문을 듣고 문득 쑥스러워졌다. 솔직히 나 역시 잘하는 것도 아니고 매일 헤매고 느리고 어설픔 투성이라 요즘 완전 쭈그리 모드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시도하는 것에 주저하지 않고, 마음 한구석에서 자리잡은 두려움을 누르고 그저 어제보다 조금이라도 나아진 오늘이 되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일의 영역을 확대하고 전문성을 넓혀나간다는 것에서 가장 필요한 건 바로 마음을 다스리기이다. 아무리 어려운 용어들에 치이고 거절을 마주하면서 한없이 쪼그라드는 내가 되는 것 같아도, 그 와중에 발견한 아주 작은 성공을 칭찬하는 것, 나를 의심하는 마음을 극복하고 작아진 나를 일으키고 충분히 잘했다고 스스로를 토닥여줄 수 있을 때 비로소 반짝이는 기회를 잡을 수 있는 것 같다. 아직도 갈 길이 멀긴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한 발자국씩 걸어가다 보면 언젠간 원하는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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