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멀리스트가 되고자 한 연초의 계획이 점점 아이들 책이 집에 많아지면서 흐지부지 되려던 차였다.
그러다 코로나로 인해 장기간 재택근무를 하는 동안 정리 정돈된 환경이 정신건강에 중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없는 집안에서는 산만해서 일에 집중도 안됐다. 그러다가 집안 물건들을 차분히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해보니 책무덤이 눈에 딱 들어왔다.
우리 집에는 책들이 엄청 많아서 이삿짐 정리할 때면 서재 정리시간이 제일 오래 걸린다. 한국에 갈 때마다 한국어 책이 고파서사온 책들, 대학원 시절 전공책들, 업무 관련 자격증 책들, 이제는 아이들을 위한 그림책 전집 등등
집안이 너무 정신없어서 정리를 하려고 했다. 그렇게 책무덤에서 버릴 책, 중고로 팔 책을 정리하던 와중 우연히 다시 펴본 책이었다.
코피묻은 노력의 흔적
형광펜에 밑줄 좍에 정말 열심히 공부했었다. 부서 이동후 몇 개월 이내로 통과해야 하는 자격증 시험 준비책이었기에 필사적으로 공부하던 기억이 난다. 당시에 임신 중이었지만 아가에게 태교 한다는 생각으로 퇴근 후, 그리고 점심시간마다 책상에 앉아 공부했다.
내가 원하던 부서로 어렵게 얻은 기회였기 때문에 미룰 수가 없었다. 다리가 저리고 배가 더부룩했지만 그래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위해 집중하면 되니까, 포기할 수 없었다. 유난히 피곤하던 어느 날 회사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와서 저녁시간에 공부하다가 붉은 피가 뚝뚝 책장 위로 떨어졌다. 고 3 때도 안 나던 코피가 나다니 처음이었다.
시험이 좀 까다롭고 헷갈리는 문제가 나와서 부서에서 몇몇은 합격 커트라인을 못 넘어서 재시험을 보던 그때,
나는 단번에 합격해서 뿌듯했고 실력을 인정받은 것 같아서 좋았다.
유명 정리 컨설턴트인 곤도 마리에에 따르면 설레지 않는 물건은 버려야 한다고 한다.
신랑은 이제 시험도 끝났는데 책은 정리하는 게 어떠냐고 물었다.
이제 쓸모가 없어진 그 책을 버릴까 했지만 그 시절 나의 열정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것 같아서 차마 쓰레기통으로 향하지 못했다.
설렘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그 시절 피 터지게 공부하던 나의 청춘시절의 열정은 기억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