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의 책임감
문득 아빠의 뒷모습이 생각날 때가 있다.
매일처럼 깔끔한 정장 차림에 출근하시던 아빠가 어느 날 후줄근한 차림으로 집에서 하루 종일 바둑을 두시고 계셨다. 구조조정은 아니었지만 당시 퇴사를 하시고 앞으로의 진로를 두고 고민을 하시던 중이었던 것 같다. 가장의 책임감이 얹힌 무거운 공기가 어깨 위로 가라앉은 것 같았다. 말없이 바둑알을 하나하나 두시면서 얼마나 진로에 대한 생각이 많으셨을까. 혼란스러운 마음을 반듯한 바둑판 위에 담아서 생각을 정리하시려던 것이 아니었을지 당시 어린 마음이었지만 아빠가 힘을 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 친구가 오랫동안 일해오던 회사가 구조조정을 하게 되어 구직 중이라는 소식을 접했다. 특히나 더욱 안타까웠던 건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기가 있는 가장이라는 사실이었다. 친구의 말을 듣고 나는 또다시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얼마나 친구가 열심히 일해왔는지 알았기에 어떤 말로도 그 충격을 위로하기엔 무게가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상처를 그저 가벼운 말 몇 마디로 덮을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기에.
금융계에서 구조조정은 흔한 일이다. 일을 잘하고 못하고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회사의 결정에 따라서 커리어가 좌우되기도 한다. 고용 유연성이 높기 때문에 의도와는 다르게 회사를 나오게 되었다고 할지라도 그 이후에도 오히려 더 좋은 회사로 이직해서 다니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꼭 슬퍼할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 건 사실이다. 커리어 성장에 의미부여를 많이 하고 열심히 일을 하는 사람들일수록 그 충격이 더 한 것 같다. 그동안 쏟아부은 나의 시간, 노력들이 무의미해지고 존재가 부정당하는 듯한 느낌이랄까. 무한 경쟁에서 생존하며 지켜온 커리어가 계획대로 되지 않을 수도 있고, 외부의 힘에 의해 조정될 수 있다는 잔인한 현실을 마주하는 순간 무기력해지는 것 같다.
한 가정을 책임지는 가장의 마음이 얼마나 무거운지 알 것 같아서, 친구에게 혹시라도 주변에 포지션을 알게 되면 꼭 알려줘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능력 있는 친구니까 굳이 나의 도움이 아니어도 충분히 다른 곳에서 연락이 올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꼭 더 좋은 기회가 다가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리고 친구가 기억했으면 좋겠다. 이 모든 것은 그 친구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그리고 우리의 명함은 하나가 아니라 사실 여러 개라는 사실도 말이다. 회사원으로서의 삶도 중요하지만 아기 부모로서의 삶도 너무 소중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