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통해 당신의 커리어 패스를 어떻게 가져가야 하는지를 고민해보는 칼럼입니다. 이 글을 통해 당신의 삶과 커리어를 어떻게 하면 주체적으로 가져갈 수 있을지를 고민해 보시기 바랍니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은 제가 3번 읽은 소설입니다. 처음에는 중학생 때였고, 2번째는 대학생 때였고, 3번째는 며칠 전 시골에 방문하기 위해서 탑승한 SRT 기차 안에서였습니다.
저는 며칠 전 이 작품을 읽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가 '학생'이던 시절에 왜 이 작품의 위대함을 이해하지 못했는지를 말이죠.
당신이 커리어너스의 글들을 많이 읽어봤다면 짐작했을 수 있겠지만, 제가 과거에 이 작품의 위대함을 이해하지 못했던 이유는 '프레임' 때문입니다. 더 정확히는 저만의 능동적 프레임을 형성하지 못했던 시절이 이 작품을 읽었기 때문에 소설 《데미안》이 들려주는 메시지를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죠.
네, 그렇습니다.
소설 《데미안》은 당신의 프레임, 더 정확히는 제가 '능동적 프레임'이라고 부르는 개념의 중요성을 설파하는 작품입니다. 더 구체적으로는 '싱클레어'라는 소설 속 주인공의 '수동적 프레임'을 탈피하는 과정과 그의 '능동적 프레임'을 형성하는 과정을 통해서, 당신만의 능동적 프레임을 찾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작품입니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
작품의 첫 페이지에 나와 있는 위의 메시지처럼, 당신만의 능동적 프레임을 형성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특히 당신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성장해 왔다면, 모르긴 몰라도, 소설 속 주인공인 싱클레어보다 수동적 프레임을 탈피하는 것이 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수동적 프레임에 갇혀 사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더욱더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이번 칼럼을 통해서 소설 《데미안》이 주는 메시지가 구체적으로 무엇이며, 당신의 삶과 커리어에 이것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를 말하고자 합니다.
《데미안》을 살펴보기에 앞서서, 커리어너스의 철학을 잘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서 저희가 설명하는 수동적 프레임과 능동적 프레임이 무엇인지부터 체크해 봐야겠습니다.
수동적 프레임과 능동적 프레임이라는 개념은 '커리어너스'라는 장소가 제대로 만들어지기도 전인 2021년 초에 처음으로 언급된 개념입니다. 그리고 저는 《프레임 자소서 작성법》이라는 책을 2021년 10월에 출판하였죠.
이 책에서 저는 우리나라의 취준생들이 자기소개서를 작성하기 어려워하는 이유는 자기만의 주체적인 관점을 말하는 '능동적 프레임'이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취준생들은 '수동적 프레임'에 입각해서 살아왔기 때문에 자기소개서를 작성하기 어려워한다는 것이죠.
수동적 프레임과 능동적 프레임을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제가 책에서 작성한 내용을 그대로 인용해 보겠습니다.
먼저 수동적 프레임(Passive Frame)입니다.
나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나를 객관적으로 인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 타인과 관계를 맺는 방식,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욕망과 그것을 충족시키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 남들과 어떻게 다른지를 파악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남들과 다른 자기만의 프레임(frame)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지닌 생각과 감정의 대부분은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정신세계는 수천 년 동안 여러 철학자, 역사가, 정치가, 과학자 등과 같은 지식인들이 만들어낸 사상, 종교, 이념, 관습, 지식, 이론들이 축적된 결과물입니다.
저는 이것을 수동적 프레임(passive frame)이라고 부릅니다. 태어날 때부터 가족과 사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자아가 만들어지기 전에 ‘수동적으로’ 형성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수동적 프레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생존을 위해 자신이 태어난 세계의 환경에 적응하도록 설계된 유기체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그저 어느 날 갑자기 태어나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의문을 갖기 전까지 주변 환경에 적응하는 본능적인 정신적 활동을 진행합니다. 그 활동이란 당신이 태어난 세계에서 사용하는 언어, 규칙, 문화, 매너 등을 학습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에는 성공에 대한 정의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성공이란 내가 좋아하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걷고 있는 길, 즉 당신의 부모, 국가, 사회, 환경에 의해 형성된 길을 걸어가는 것이 성공이라고 배웁니다. 이런 식으로 당신의 프레임은 수동적으로 형성됩니다.
《관점만 잡았을 뿐인데 합격률이 91%가 됐습니다, p.9~10》
수동적 프레임은 생물학적으로 인간이 매우 오랜 시간 동안 나약한 상태로 지내야만 하기 때문에 형성되는 프레임을 말합니다. 반면, 능동적 프레임은 우리가 주체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순간부터 형성되는 프레임을 말합니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 당신은 처음으로 본인의 프레임에 의문을 제기하는 순간을 맞이합니다. 그 순간은 큰 사연이 없는 한, 보통 대학교에 들어간 이후입니다.
대학생이 된 후에는 중·고등학생 시절과 달리 여러 사람과 다양한 경험을 하며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능동적으로’ 알아갈 기회를 많이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관심 있는 분야에 관한 책을 읽거나 아르바이트를 해보거나, 동아리에서 사람을 만나거나 여행을 다녀보면서 세상에는 내가 걸어온 길과는 다른 수많은 길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 과정을 통해 당신은 커리어 정체성 형성에 필요한 자기 인식(self-awareness)을 경험합니다. 다시 말해서, 당신이 현재 지니고 있는 프레임이 100% 본인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서서히 능동적 프레임을 형성하게 됩니다.
능동적 프레임(proactive frame)이란 사회나 문화적 맥락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 당신의 의지와 선호도에 따라 형성한 자발적 프레임을 말합니다.
《관점만 잡았을 뿐인데 합격률이 91%가 됐습니다, p.10~11》
수동적 프레임과 능동적 프레임이라는 용어는 제가 당신의 '주체적인 관점'이 결국 취업의 핵심이자 성공적인 커리어를 위한 토대이기 때문에 만든 용어이지만, 이 개념은 역사적으로 위대한 인물들에 의해서 강조되어 왔습니다.
그중 가장 대표적으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있습니다. 제가 며칠 전에 작성한 글에서도 언급했던 것처럼, 그는 아래와 같이 수동적 프레임과 능동적 프레임에 대한 중요성을 설파하였습니다.
(···) 우리의 본성은 사회적 동물의 특징을 닮았다. 우리는 다른 이들이 키운 음식을 먹고, 다른 사람이 만든 옷을 입으며, 다른 사람이 지은 집에서 산다. 대부분의 지식과 생각은 누군가가 창조한 언어라는 매개체를 통해 다른 사람들로부터 전달받았다. (···)
우리가 인간 사회 속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야수가 가지지 못한 중요한 이점임을 인정해야 한다. 태어나면서부터 홀로 남겨진다면, 인간은 사고와 감정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원시적이고 야수 같은 상태에 머무를 것이다.
(···)
공동체에서 한 사람이 지니는 가치는 무엇보다 그의 감정, 사고, 행동이 얼마나 이웃에 도움이 되느냐에 달려 있다. 이 기준에 따라 선하다거나 악하다는 평가를 내리게 된다. 얼핏 보면, 오로지 사회적 자질로만 한 인간을 평가하는 듯하다.
그런데 그런 태도는 잘못된 것일 수 있다. 물질이나 정신 그리고 도덕에 걸쳐, 우리가 사회로부터 얻는 모든 가치의 근원을 찾아 무수한 세대를 거슬러 오르면, 창조적인 한 개인에 이를 것이 분명하다. 불의 사용, 식용 작물의 재배, 증기기관 등은 한 개인이 발견한 것이다.
오직 개인만이 사고할 수 있고, 그 결과 사회에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 (···) 공동체의 자양분 없이 개인의 인격 성장을 기대할 수 없는 것처럼, 창조적이면서 독립적인 사고와 판단력을 가진 개인이 없다면, 사회의 진보는 불가능하다.
《나는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 p.36~37》
이쯤이면 이해가 되실지 모르겠습니다.
정리하자면 수동적 프레임은 당신이 당신 스스로가 아니라 가족, 친구, 국가, 사회 등과 같이 외부에 의해 '만들어진' 관점을 의미하고, 능동적 프레임은 당신이 당신의 내면의 목소리가 옳다고 주장하는 것들에 의해서 '만들어온' 관점을 의미합니다.
이 칼럼의 타이틀로 달아둔 《데미안》을 설명하기 전에 이렇게 길게 수동적 프레임과 능동적 프레임을 설명하는 이유는, 제가 읽은 소설 《데미안》은 주인공 싱클레어가 수동적 프레임을 인지하고, 자각하고, 탈피하고 자기만의 능동적 프레임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이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겪는 갈등을 그리는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소설 《데미안》을 읽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 작품을 이해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오죽하면 이 작품을 읽은 몇몇 사람들은 이 작품을 주인공 싱클레어가 친구인 데미안의 엄마(에바 부인)를 사랑하는 과정을 그리는 이상성욕자의 성장기라고 평가할까요?
물론 '문학'이라는 예술이라는 장르의 아름다움은 각자의 관점에 입각해서 그 작품을 해석하는 것이기 때문에, 저는 이 작품을 '이상성욕자의 성장기'라고 평가하는 사람들의 해석도 존중합니다. 하지만 제가 이 작품의 위대함을 느꼈던 것처럼, 헤르만 헤세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제가 해석한 메시지는 무엇이었는지를 이해하신다면, 이 작품을 당신의 삶과 커리어에 조금 더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해석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이 작품의 초반부에 등장하는 주인공 싱클레어가 어떤 수동적 프레임을 가지고 있는지를 살펴봐야겠습니다.
소설 《데미안》은 성인이 된 주인공 싱클레어가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면서 시작됩니다.
내가 열 살이고 작은 도시의 라틴어 학교에 다니던 시절의 체험 하나로 내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그 시절로부터 짙은 향기가 밀려와, 속에서부터 아픔과 기분 좋은 전율로 마음을 뒤흔든다. 어두운 골목들과 환한 집들, 탑들, 시계 치는 소리와 사람들 얼굴, 편안함과 따뜻한 쾌적함으로 가득 찬 방들. (···) 그곳에서는 두 세계가 뒤섞였다. 밤과 낮이 두 극으로부터 나왔다.
《데미안, p.10》
《데미안》의 1장의 타이틀은 '두 세계(Two Worlds)'입니다. 그리고 위에서 인용된 표현처럼 두 세계는 밤과 낮으로 은유됩니다. 그리고 주인공이 느끼는 이에 대한 감정은 '아픔'과 '기분 좋은 전율'처럼 대조적이죠.
여기서 두 세계는 제가 길게 설명한 수동적 프레임과 능동적 프레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작품에서는 수동적 프레임을 '선(善)'이라고 표현하고, 능동적 프레임을 '악(惡)'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만약 당신이 매우 평범한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당신 역시 수동적 프레임을 좋은 것이라고 여기고, 능동적 프레임을 나쁜 것이라고 여길 가능성이 높습니다. 마치 소설 속 주인공처럼 말이죠.
이 작품의 1장에서 주인공은 신앙심이 매우 깊고 밝은 가정에서 자라왔습니다. 다시 말해서 '밝은 선의 세계'에서 자라온 사람인 것이죠. 하지만 나이가 먹어가면서 하녀와 장인들, 부랑자와 주정뱅이 등을 통해서 '어두운 악의 세계'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이 악의 세계가 매혹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죠.
그래서 주인공 싱클레어는 덩치도 크고 학교에서 잘 나가는 '일진'의 무리에 속하는 프란츠 크로머라는 친구와 어울리게 됩니다. 어느 날 싱클레어는 일진들에게 '있어보이기' 위해서 자신이 하지도 않은 범행을 거짓으로 떠벌리게 됩니다. 그리고 크로머라는 일진은 이를 빌미로 싱클레어의 돈을 뜯기 시작하고, 싱클레어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후회하게 됩니다.
(···)
싱클레어: 알겠어, 하지만 대체 어디서 돈을 가져오란 말이야? 하느님 맙소서, 난 돈이 없는데.
크로머: 너네 집에는 돈이 충분히 있잖아. 가져오고 안 가져오고는 네 일이지. 그럼 내일 학교 끝나고다. 말해 두지만, 만약 안 가져오면······
그 애는 무서운 눈길로 내 눈을 쏘아보고, 또다시 침을 뱉고는 그림자처럼 사라졌다.
나는 계단을 올라갈 수 없었다. 나의 인생이 산산이 부수어져 있었다. 달아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거나 물에 빠져 죽을 생각을 했다. (···) 나의 죄악은 이것이냐 저것이냐가 아니었다. 나의 죄악은 내가 악마에게 손을 내밀었다는 사실 자체였다. 왜 나는 함께 갔던가? 왜 나는 일찍이 아버지 말에 귀 기울인 것보다 더 크로머의 말에 귀를 기울였던가? 왜 나는 저 도둑질 이야기를 지어내고 영웅적 행위라도 되는 양 범행을 뽐냈을까? 이제 악마가 내 손을 잡았다. 이제 적이 나를 뒤쫓고 있었다.
《데미안, p.23~24》
생물학적인 관점으로 바라봤을 때, 주인공 싱클레어는 결코 어리석은 일을 한 것이 아닙니다. 청소년기에 할법한 자연스러운 일을 한 것입니다.
우리가 또래에 어울리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사회적 본능(Social Instinct) 또는 공동체 본능(Community Instinct)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죠.
확신하건대, 당신도 싱클레어와 비슷한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학창 시절에 '또래'에 어울리기 위해서 원하지 않는 일을 하기 때문이죠. 싱클레어처럼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범행에 대해서 거짓말로 자신을 포장하지는 않더라도, 당신은 친구들과 어울리기 위해서 자신이 좋아하지도 않은 스타일의 액세서리를 구매하거나, 또래가 쓰는 용어를 반복적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제 사촌 동생 또한 이런 경험이 있습니다. 제 사촌 동생은 패딩을 입는 것에 관심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친구들이 모두 고가의 패딩을 입고 있기 때문에 부모님께 고가의 패딩을 사달라고 조르면서 원하지 않게 등골 브레이커가 된 경험이 있습니다.
이렇게 인간은 태생적으로 타인들과 협력하려는 성향을 타고났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선조들이 살던 환경에서는 '협력'을 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조상님들의 성향을 물려받은 우리는 특히 청소년기 시절에 친구들과 어울리기 위해서 부단한 노력을 기울입니다. 바로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친구들이 옳다고 여기는 것, 또래가 좋다고 여기는 것, 사회가 정의롭다고 여기는 것을 학습하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바로 이것을 저는 '수동적 프레임'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앞서서 강조했던 것처럼 수동적 프레임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습득해야 할 관점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이 작품에서 수동적 프레임이 밝고 선한 세계라고 묘사되는 것입니다.
크로머에게 지속적으로 협박을 당하던 가여운 주인공 싱클레어는 구원을 받게 됩니다. 자신보다 한 학년 높은 데미안으로부터 말이죠. 어떻게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데미안은 크로머와 이야기가 잘 되었다면서 싱클레어가 자유를 되찾을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데미안은 또래와 어울리지 않게 이미 능동적 프레임을 갖춘 사람으로 묘사됩니다. 왜냐하면 데미안의 어머니인 에바 부인이 능동적 프레임을 마스터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데미안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은 굉장히 위험합니다. 오죽하면 성경에서 인류 최초의 살인자로 묘사되는 카인(Cain)을 '비범한 정신과 담력을 지닌 사람'이라거나 '늠름한 젊은이'라고 묘사합니다.
종교적 관점에서 '카인'이라는 인물은 죄악의 상징으로 묘사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숭배의 부족의 대표자로서 '악'한 인물이죠. 이런 이유 때문에, 의무와 책임, 양심의 가책과 고해, 용서와 선한 원칙들, 사랑과 존경, 성경의 말씀과 지혜라는 독실한 세상에서 성장해온 싱클레어는 데미안의 말에 충격을 받게 됩니다.
(···) 나는 아직 한 번도 그 어떤 성서 이야기나 다른 이야기에 대해 그렇게 많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 성경에 써 있는 그 이야기는 짧고 분명했다. 그리고 거기서 어떤 남모르는 특별한 풀이를 해본다는 건 완전히 미친 짓이었다. 데미안의 말대로라면 사람을 쳐죽인 자도 스스로를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이라고 선언할 수도 있었다! 아니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데미안이 그 이야기를 하는 태도가 세련되었을 따름이었다. 마치 모든 것이 자명한 일이나 되듯 그렇게 쉽고 멋지게, 그리고 거기다 그런 눈으로 말하다니!
《데미안, p.42~43》
많은 혼란을 겪게 되지만 싱클레어는 데미안을 멀리 하게 됩니다.
데미안은 학교에서 인기도 많고 힘도 세고 여자들과도 잘 어울리는 '인싸'처럼 보였지만, 과거 일진들과 어울리려고 하다가 고생했던 것을 떠올리며, 데미안이 자신을 구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멀리하며 자신이 속한 '선한 세계'로 되돌아갑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속한 선한 세계의 관점에서 데미안이 주장하는 내용들은 '악'한 것이기 때문이죠. 주인공 싱클레어는 '악'의 세계에 다시 유혹당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합니다.
(···) 데미안이 나를 크로머의 손아귀에서 구해 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평생 병들고 상했을지도 모른다고 지금도 나는 확신한다. 당신에도 이 구원을 나는 내 짧은 인생의 가장 큰 경험으로 느꼈다. 그러나 구원해 준 사람을, 그가 기적을 완수하자, 나는 곧 제쳐두었다.
(···)
(···) 내 본성은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균형과 안정에 이르려 했다. 그렇게 본성은 무엇보다 그 많은 추하고 위협적인 것을 떨쳐버리려고, 잊어버리려고 노력했다. (···)
나의 조력자이자 구원자에 대해서도 똑같이 빨리 잊어버리려 했다는 것도 이제는 이해하겠다. (···)
《데미안, p.59~60》
데미안과 헤어진 이후 싱클레어는 대학에 가게 됩니다. 대학에 가서 많은 일들을 겪으면서 주인공은 성장하게 됩니다.
대학교 수업을 빼먹고 술집에서 밤을 새우며 학업을 등한시하고, 학사 경고를 받고 퇴학을 당할 상황에도 놓이기도 하고, 베아트리체라는 여성을 만나서(?) 다시 성실한 생활을 하고, 피스토리우스, 크나우어 등과 같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자신에게 옳은 것을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시간을 갖게 됩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 주인공 싱클레어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세상이 규정하는 선과 악이 아니라, 내가 규정하는 선과 악이라는 것이죠. 그러니까 세상이 옳다고 말하는 수동적 프레임이 아니라, 내가 옳다고 말하는 능동적 프레임을 형성하는 것이 자신의 과업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 갑자기 예리한 불꽃같은 인식이 나를 불태웠다. (···) 각성된 인간에게는 한 가지 의무 이외에는 아무런, 아무런, 아무런 의무도 없었다. 자기 자신을 찾고, 자신 속에서 확고해지는 것, 자신의 길을 앞으로 더듬어 나가는 것, 어디로 가든 마찬가지였다. (···)
(···) 나도 또 다른 인간이 되라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모든 건 다만 부수적으로 생성된 것이었다.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진실한 직분이란 다만 한 가지였다. 즉 자기 자신에게로 가는 것. (···) 자신의 운명을 찾아내는 것이며, 운명을 자신 속에서 완전히 그리고 굴절 없이 다 살아내는 일이었다.
《데미안, p.171~172》
싱클레어는 이 이후 데미안과 그의 어머니인 에바 부인을 만나면서 자신만의 능동적 프레임을 더욱 더 확고하게 만들어가게 됩니다.
이 작품은 상당히 철학적인 작품입니다. 선이 옳은 것인지, 악이 옳은 것인지를 고민하도록 하는 작품입니다. 게다가 종교적인 이야기도 상당히 많이 나오기 때문에 옳고 그름이란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만들죠.
이런 고민들에 대해서는 저보다 더 똑똑하신 분들의 이야기를 들으시면 됩니다. 저는 실용주의자로서, 당신이 이 작품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어떻게 당신의 실생활에 적용해야 할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를 위해서 당신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보셔야 합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선과 악은 무엇인가요?
당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당신이 수동적 프레임에 입각한 삶을 살아왔다면 당신이 생각하는 선은 타인들이 생각하는 선과 똑같을 것입니다. 반면, 당신이 능동적 프레임에 입각한 삶을 살아왔다면 당신이 생각하는 선은 타인들이 생각하는 선과 똑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겠죠.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실생활과 관련한 예시를 들어보겠습니다.
제 친구 중 한 녀석은 '식욕'이 많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보다 '먹는 것'에 대한 가치를 매우 높게 여깁니다. 이 친구는 한 끼 식사에 5만 원 이상을 지출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으며, 새로 오픈한 식당에서 3시간을 기다리는 것을 힘들어하기는커녕 즐거워합니다.
하지만 저는 다른 사람입니다. 저 역시 식욕이 많고 먹는 것을 좋아하지만 저는 한끼 식사에 5만 원 이상을 지출하고 한끼 식사를 위해서 3시간이나 기다리는 행위는 미친 짓이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그 시간과 그 돈으로 제가 좋아하는 책을 구매하거나 게임을 하는 것이 더 이익이라고 생각합니다.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으로 정리하자면, 저는 친구를 먹을 것만 밝히는 '악'한 녀석이라고 생각하고 제 스스로를 '선'이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세상은 이렇게 이분법으로만 돌아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선과 악의 중간 어딘가에 모호하게 걸쳐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예를 들어서, 저도 한 끼 식사를 위해서 3시간을 기다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특히 해외 여행을 갈 때 이런 경향성이 심해지는데, 제가 생각하는 여행의 즐거움의 50% 이상은 경험해보지 못한 먹는 것의 즐거움으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우리는 서로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가 다르기 때문에, 각자가 선과 악이라고 생각하는 범위와 요소들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세상이 규정하는 선과 당신이 규정하는 선이 판이하게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실용적으로 '커리어'와 관련된 예시로 설명해 볼까요?
당신이 성장해 오면서 부모님으로부터, 선생님으로부터, 사회로부터 어떤 직업이 각광을 받을 것이다라는 말을 많이 들어오셨을 것입니다. 의사, 변호사, 판사, 검사, 회계사, 선생님, 공무원, 기술자 등과 같은 직업들을 가져야지 성공적이면서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들어오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너무나도 빠르게 변합니다. 예컨대, 20년 전의 선생님과 현재의 선생님의 위상은 많이 변해있습니다. 제가 학교를 다닐 당시의 선생님의 권위는 하늘과 같았지만, 현재 선생님들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추락하였습니다. 과거에는 선생님이라는 직업을 갖는 것이 당신에게도 옳은 것이었을 수 있어도, 현재에는 옳지 않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와 비슷하게 10년 전에는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각광을 받아서 코딩을 배우는 것이 중요했지만, AI가 알아서 코드를 짜는 현대의 시대에는 코딩을 배우는 것에 대한 중요도가 과거보다는 떨어졌습니다.
그럼 어쩌라는 말일까요?
타인들의 옳다고 말하는 것을 의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부모님, 친구들, 선생님들이 옳다고 말하는 것들이 당신에게도 옳은 것인지를 꾸준히 의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의 권위가 20년 전에 비해서 많이 떨어졌다고 하더라도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선생님이라는 직업이 '선'일 수 있습니다. 주변에서 선생님이라는 직업으로는 앞으로 먹고 살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며 그것을 '악'하다고 말할지라도 말이죠.
3년 동안 죽어라 노력해서 대기업에 입사한 사람이 1년 뒤에 퇴사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5년 동안 노량진에서 열심히 공부해서 공무원이 된 사람이 1년도 안 돼서 일을 그만두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들이 어리석어서일까요? 아닙니다. 세상이 '선'하다고 말한 것들과, 그들이 '선'하다고 말하는 것이 판이하게 달랐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당신의 삶과 커리어를 대신해서 살아주지 않기 때문에, 당신이 '선'하다고 여기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다수'가 선한다고 여기는 것을 그냥 당신에게 말할 뿐입니다. 소설 《데미안》의 제목이 주인공 '싱클레어'가 아니라 '데미안'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악'하다고 말하는 것이 당신에게는 '선'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세상이 옳다고 말하며 '선'하게 여기는 것은 사실은 더 이상 옳지 않은 '악'한 것일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소설 속에서 주인공이 마음을 빼앗기는 신인 '압락사스(Abraxas)'는 신과 악마가 결합된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을 결합한다'는 말의 여운이 귀에 남아 있었다. (···) 우리는 아마도 우리가 존경하는 신 하나를 가지고 있겠지만, 그는 함부로 갈라놓은 세계의 절반만 타나낸다고(그것은 공식적이고, 허용된 '환한' 세게였다). 그러나 세계 전체를 존중할 수 있어야 한다고. 그러니까 악마이기도 한 신 하나를 갖든지, 아니면 신에 대한 예배와 더불어 악마에 대한 예배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압락사스는 신이기도 하고 악마이기도 하 신이었다.
《데미안, p.125~126》
제가 어린 시절에는 길거리는 물론 시내버스에서 흡연을 하는 행위는 나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현대에는 시내버스에서 흡연을 하면 미친놈 소리 듣기 딱 좋겠죠. 이처럼 과거에는 인종을 차별하는 행위도, 여성에게 투표권이 없는 것, 일주일 내내 일을 하는 것도 선한 행위였습니다. 그래서 이런 행동을 악하다고 외치는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규탄을 받고, 누군가는 목숨까지 잃어야 했습니다. 천동설과 지동설과 관련된 이야기, 빛의 이중성과 양자역학에 대한 인사이트 역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선'한다고 말하는 것을 의심했던 '악'한 사람들에 의해서 얻어진 것들입니다.
이렇게 세상은 '선'한 것으로만 돌아가지 않습니다. 세상의 변화는 '악'에 의해서 시작되며, 시간이 지난 후에는 그 '악'이 '선'한 것이라고 밝혀질 수 있습니다.
제가 괜히 취업을 위해서, 아니 취업뿐만이 아니라 당신의 커리어를 성공적으로 가져가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당신의 수동적 프레임이 무엇인지를 인지하고, 능동적 프레임이 무엇인지를 정리하는 것이라고 강조한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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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패션, 미용, 연예 등과 같은 주제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선'하다고 여기는 것을 그대로 수용합니다. 굳이 저의 시간과 비용을 들여서 고민하는 것보다는 다른이들이 옳다고 말하는 것을 수용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니까요.
하지만 저는 커리어, 비즈니스, 경제, 뇌과학, 심리학, 투자, 경제, 철학 등과 관련한 주제들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선'하다고 여기는 것들 의심합니다. 제 스스로를 '악'이라고 규정하고, '선'하다고 말하는 것들이 정말로 '선'한 것인지를 의심하고 연구하고 고민합니다.
그러면 이제 당신이 해야 할 것은 하나입니다. 아래와 같은 질문을 스스로 던져보고, 당신의 길이 무엇인지를 고민해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선'이라고 규정하는 영역은 무엇이며,
'악'이라고 규정하는 영역은 무엇인가요?
당신은 어떤 영역에서 '악'한 사람이 될 것인가요?
p.s. 당신이 옳다고 여기지만 세상 사람들이 틀리다고 말하는 영역이 바로 당신이 성공할 수 있는 영역입니다. 소설 속 등장인물인 데미안(Demian) 악마(Daimon)를 떠올리게 하는 것은 작가의 의도가 아닐까요? 선과 악의 균형이 이루어지는 곳에서 탄생합니다. 압락사스가 은유하는 것이 이것이 아닐까 싶네요.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압락사스.
《데미안, 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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