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당신은 수레바퀴 아래에 깔려 있지는 않은가

수레바퀴 아래서 데미안을 거쳐 싯다르타로 가는 자기이해의 여정

by 강동현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는 대한민국이라는 거대한 공장식 교육 시스템을 거쳐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정독해야 할 명작이다. 특히 이 소설의 초반부, 주인공 한스 기벤라트의 아버지에 대한 묘사를 읽을 때면 나는 소름 돋는 기분을 느낀다. 그 문장들이 마치 10년 전, 나의 과거를 거울처럼 비추고 있기 때문이다.


헤세는 한스의 아버지를 이렇게 묘사한다.


그의 내적 생활은 보통 사람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의 내부에서 아주 작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을지도 모를 정서 따위는 벌써 오래전 먼지 속에 파묻히고 말았다. 인습적인 무뚝뚝한 가족 의식이라든가, 아들에 대한 자부심 정도가 남아있는 유일한 정서라고나 할까. 그의 정신적 능력이란 융통성 없는 타고난 잔꾀와 계산을 벗어나지 못했다. 독서는 신문에 한정되어 있었고, 예술 감상의 욕구는 가끔 구경하는 서커스 정도로 그쳤다.

이웃의 이름과 주소를 그와 바꿔놓는다 하더라도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언제나 일체의 비범한 것, 자유로운 것, 정신적인 것에 대한 본능적인 적대감이 발동하고 있었다. 그것은 거리의 다른 사람들이 갖고 있는 감정과 다를 바 없었다.

그 단조로운 생활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자신을 의식하지 못하는 비극을 서술한다는 것은 사려 깊은 풍자가만이 할 수 있는 일일지도 모른다.


10년 전, 나는 한스의 아버지였다. 회의적인 태도로 자본주의적 관점만을 고수하던 10년 전의 내 모습이 딱 저러했다. 당시의 나에게 "내면의 감정을 돌봐야 한다"는 말은 그저 한가한 소리, 혹은 '개소리'에 불과했다.


유물론적인 관점에 매몰되어 오직 눈앞에 보이고 손에 쥘 수 있는 물질적인 것만이 가치 있다고 신봉했다. 글을 읽는 행위는 오직 신문과 인터넷 뉴스의 정보를 습득하는 것에 한정되었고, 예술은 남들이 우러러보는 작품에 기계적인 박수를 보내는 수준이었다.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인간관계는 가차 없이 잘라냈다. 설령 그것이 가족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나는 이번에 세 번째로 《수레바퀴 아래서》를 읽으며 헤르만 헤세라는 작가가 인간의 본질을 얼마나 깊게 꿰뚫고 있는지 새삼 실감했다. 건방진 표현일지 모르지만, 그는 내가 했던 고민들을 나보다 훨씬 먼저, 그리고 더 깊게 파고들었다.


《수레바퀴 아래서》는 내가 무서울 정도로 똑같이 걸어왔던 과거의 길을 묘사하고,《데미안》은 내가 지금 아프게 뚫고 지나가고 있는 현재의 길을 보여주며,《싯다르타》는 내가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지혜로운 길을 그려내고 있다.




내가 오늘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명확하다. 당신이 과거의 나처럼 살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스스로 만족하며 산다면 상관없겠지만, 나의 경험과 수많은 상담 사례에 비추어 볼 때, 그런 삶은 결국 깊은 후회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내가 누구인지 모른 채 사회가 정해놓은 프레임과 매뉴얼에 따라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지독하게 괴로운 일이다. 더 비참한 것은, 자신이 괴롭다는 사실조차 의식하지 못한 채 '남들도 다 이렇게 산다'며 자신을 위안하는 상태다.


헤세는 자신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을 '비극'이라고 표현했다. 과거의 나라면 콧방귀를 꼈을 이 말이, 이제는 절실한 진리로 다가온다. 살아가면서 자신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만큼 커다란 비극은 없다. 그것은 내 삶의 운전대를 내가 아닌 '인습'과 '타인의 시선'에 맡겨버린 채 절벽으로 향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당신이 스스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글을 수집하고 기록한다. 당신의 수레바퀴가 당신을 짓누르기 전에, 잠시 멈춰 서서 당신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기를 바란다.





▶ 수레바퀴 아래 깔린 자신을 의식하지 못하는 비극을 멈추고 싶다면, 《자기이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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