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의 인형에서 '나'라는 주체적 인간으로
올해는 특이하게 거의 10년 동안 연락한 번 하지 않았던 인연들로부터 새해에 얼굴 좀 보자는, 예상치 못한 안부 인사들이 날아든다. 인생은 참 역설적이다. 서울 한복판에 살 때는 잠잠하던 소식들이, 정작 그곳을 떠나 거리를 두기 시작하자 "얼굴 좀 보자"며 아우성을 친다.
대부분은 "너도 새해 복 많이 받아"라는 건조한 답장으로 매듭지었지만, 유독 한 친구의 연락 앞에서는 손가락이 멈췄다. 7~8년 전 결혼 소식 이후, 암이라는 긴 터널을 지나온 그녀였다. 투병의 고단함을 아는 처지라, 나는 기꺼이 그녀를 만나러 나섰다.
우리가 어떻게 친해졌는지 돌이켜보면 여전히 의문이다. 그녀와 나는 성장 배경부터 기질까지 상극에 가까웠다. 나는 이른바 '강남 8학군'과는 거리가 멀었고, 예의범절은 가식적인 행위라고 여기면서 선밴들 앞에서 까불다가 늘 한 대씩 손찌검을 당하던 나와 달리, 그녀는 부유한 환경에서 자라난 무남독녀였고, 모임에서조차 정제된 침묵과 예의를 고수하던 '모범생'이었다. 예체능에 무지한 나와 달리 그림을 그리는 것을 취미로 하고 피아노 실력은 대회에서 입상을 할 정도로 수준급이었다.
카페에서 마주 앉은 우리의 대화는 자연스레 '투병'으로 흘러갔다. 나는 심장과 뇌라는 비교적 명확한 적과 3년여를 싸웠지만, 그녀는 전이와 변이가 빈번한 암세포라는 불확실한 대상과 5년 넘게 사투를 벌였다. 다행히 완치 판정을 받았다는 그녀의 얼굴은 예전과는 사뭇 다른 빛을 띠고 있었다.
나는 이야기를 하면서 그녀의 성향이 상당히 많이 변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는데, 이에 대해서 묻자 그녀는 투병 생활을 하면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게 됐다며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다음은 그녀가 정신없이 뱉어낸 말의 조각들을 정돈된 형태(?)로 요약한 것이다.
병치레를 오래 하다보니 제 성격이 변했나봐요. <여우와 신포도> 이야기에서 여우처럼 정신승리를 하는 느낌이지만, 저는 병에 걸린 후의 저의 모습이 더 좋아요. 많은 사람들이 제가 살던 곳이나 부모님의 직업 때문에 제가 부유하게 살아왔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아니 물론 부유하게 살아온 것은 맞지만, 저는 심적으로 가난한 사람이었거든요.
계급과 권위에 목숨을 거는 아버지와 외부의 시선과 평판을 중요시하는 어머니 밑에서, 저는 지극히도 형식적인 아이로 성장해왔어요. 저는 두 분이 사랑을 표현하는 장면은 물론, 서로 언성을 높이는 장면을 본 적이 없어요. 제 친구는 이런 집안이 부럽다고 하던데, 부모님께 늘 '예 or 아니오'로만 대답해야 하고, 학교에서 기쁘거나 속상한 일을 이야기해도 공감은 커녕, 밖에서는 예의바르게 행동해야 한다는 말만 하시는 부모님이 정말 부러울까요?
물론 물질적으로 많은 지원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이유 때문에 저는 살아오는 동안 단 하루도 제 스스로 제 몸을 돌본 적이 없더라구요. 심지어 암에 걸리기 전까지는, 심지어 결혼을 한 이후에도 저는 제가 누군가를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을 여태껏 진지하게 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암에 걸린 후) 강제적으로 제가 저를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 와서, 제가 좀 달라진 것 같아요. 선배처럼 좀 솔직해졌다고나 할까요?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를 해방시킨 것은 치명적인 질병이었다. 죽음의 문턱에서 비로소 그녀는 부모의 기대나 타인의 시선이 아닌, 자신의 몸과 마음을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그녀는 이제 자신의 약점과 불완전함을 숨기지 않는다. 주변이 원하는 길을 걷던 관성을 멈추고,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묻기 시작했다. 고통이라는 가혹한 스승을 통해, 그녀는 타인이 입혀준 옷을 벗어던지고 비로소 자신의 피부를 만져보게 된 것이다. 철학자 사르트르가 말했듯, 인간은 스스로를 창조해 나가는 존재라는 사실을 그녀는 병실 침대 위에서 온몸으로 깨달았다.
이 친구는 자신이 원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고민 중이라고 한다. 앞으로 어떤 일을 하면 좋겠느냐는 그녀의 질문에, 나는 직업보다는 '가치'를 먼저 찾으라고 조언했다. 일을 찾는 것은 기술적인 문제지만, 내가 어떤 가치를 지향하는지를 아는 것은 존재의 기초를 세우는 일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나는 뼈아픈 조언도 덧붙였다.
나의 정체성을 이해하는 것도 힘들지만, 그 정체성을 이 견고한 사회 속에서 실제로 구현하며 사는 건 훨씬 더 고통스러운 일일 거야.
너무 차가운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이 사실이다. 나를 아는 것은 시작일 뿐이며, 그 앎을 삶으로 증명해 내는 데에는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 타인의 시선이라는 안온한 그늘을 벗어나 자기만의 태양 아래 서기로 결심한 그녀. 나는 그녀가 '솔직함'이라는 무기를 들고 세상과 다시 마주할 그날을 진심으로 응원하며 돌아왔다.
▶ 무너진 자존감과 잃어버린 자아를 다시 세우는 방법론, 《자기이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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