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을 위해 버틴다"는 숭고한 거짓말에 대하여

by 강동현

커리어너스가 지난 5년간 일관되게 외쳐온 철학이 있다. 스스로의 수동적 프레임을 자각하고, 자기이해를 통해 나만의 차별화된 관점을 정립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명령은 냉혹한 현실 앞에서 때로 무력해진다. 내가 생존을 위한 노동에 매몰되어 있을 때, 나를 들여다보는 일은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월든》에서 "노동하는 사람은 참다운 인간 본연의 자세를 유지할 여유가 없다"고 일갈했다. 매일의 끼니를 걱정하며 하루살이처럼 오늘을 벌어 오늘을 살아내는 이들에게 자기이해는 분명 사치일 수 있다. 나 역시 20년 전, 생존 자체가 과업이었던 시절에는 나를 이해하려는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당신의 삶은 어떠한가. 일주일을 마무리하며 영화 한 편을 볼 여유가 있고, 친구와 술 한잔을 기울이거나 이따금 여행을 떠날 경제적·시간적 '마진(Margin)'이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이때부터 자기이해는 선택이 아닌, 삶을 업그레이드하기 위한 '실존적 책무'가 된다. 생존을 위해 허덕이던 에너지를 이제는 '가치'를 향해 전환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가족을 위해 오늘을 버틴다"는 말로 스스로를 위로한다.



분명히 고결하고 위대한 사명이자 숭고한 희생처럼 들리지만, 여기에는 거대한 함정이 숨어 있다. 가족을 위해 일한다면, 정작 그들이 원하는 행복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행복을 함께 누릴 '나'는 어떤 상태여야 하는지를 먼저 고민해야 한다.



나를 잃어버린 채 수행하는 희생은 결국 공허함과 보상 심리로 이어진다. 심리학자들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모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경고한다. 자기이해를 주제로 글을 쓰는 나조차도, 수십 년간 내향적인 기질을 외면한 채 외향적인 가면을 쓰고 살아왔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현대 사회의 정교한 시스템은 우리의 뇌가 생존에 최적화되도록 강요하며, 카를 융이 말한 본연의 모습인 '자기(Self)'를 깊숙한 곳에 숨겨버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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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논의는 매슬로의 '욕구 계층 모델'과 닿아 있다. 하위의 생리적 욕구와 안전의 욕구가 어느 정도 충족되었다면, 인간은 본능적으로 상위 단계인 '자기실현'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만약 먹고 살 만한 수준에 도달했음에도 여전히 자기이해를 사치로 여긴다면, 그것은 성장을 거부하고 하위 계층에 자발적으로 머무는 것과 같다. 숏츠(Shorts)를 보며 의미 없이 흘려보내는 10분은 편안할지 모르나, 그 시간은 당신의 본질을 조금도 채워주지 못한다. 반면, 하루 10분 '무의식 글쓰기'를 통해 내면의 목소리를 받아적는 행위는 당신의 커리어와 삶을 장기적인 성공으로 이끄는 열쇠가 된다.


나를 이해하지 않고 살아가는 삶만큼 나중에 뼈아프게 후회되는 일은 없다. 당신이 무의식중에 사용하고 있는 수동적 프레임을 걷어내고, 융이 말한 '개성화(Individuation)'의 과정을 밟아야 한다.



단순히 생존만을 위해 살아가던 날들을 더 가치 있는 하루들로 전환하라. 10분의 글쓰기는 그 위대한 전환의 시작이다.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정립될 때, 비로소 세상이 요구하는 정답이 아닌 '당신만의 관점'으로 쓰인 당신만의 커리어가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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