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교육은 아이들에게 '성격 성형'을 강요한다

스토너의 딸, 그레이스가 스스로를 파괴해야 했던 이유

by 강동현

* 이 글은 출판 예정 도서 《자기이해학》의 일부 내용을 브런치 독자분들께만 미리 선공개하는 글입니다. 이 글을 통해서 대한민국의 교육 시스템이 당신에게 어떤 사람이 되도록 강요했는지를 확인하세요.




미국의 소설가 존 윌리엄스(John Williams)가 집필한 《스토너》라는 작품에서 등장하는 주인공 스토너의 딸 그레이스는 본래 내향적이고 섬세한 아이였습니다. 아버지가 서재에서 집필 활동을 하는 동안 곁에서 고요히 책장을 넘길 때 비로소 평온을 얻는 아이였습니다. 하지만 어머니 에디스는 딸의 그런 기질을 ‘고쳐야 할 결함’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녀는 딸이 세상 밖으로 나가 활발하게 교류할 것을 끊임없이 종용했고, 그 압박에 짓눌린 그레이스는 어머니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외향성’이라는 이질적인 가면을 뒤집어 쓰게 됩니다.



이 가면을 쓴 순간부터 그레이스의 삶은 소리 없이 붕괴하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본질을 공유하던 아버지로부터 유배되듯 멀어졌고, 내면의 고립과 정체성의 혼란은 걷잡을 수 없이 깊어집니다. 본연의 자아를 배신하고 타인의 기대에 자신을 박제한 대가는 참혹했습니다. 그녀는 결국 무의식적으로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방향으로 자신의 생을 끌고 갑니다.



비록 소설 속에서 그레이스의 서사는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지만, 저는 심리학적 관점에서 ‘자기이해’ 없이 외향성을 강요당한 한 영혼의 몰락으로 읽혔기에, 결코 외면하기 힘든 무게감을 느꼈습니다. 그레이스의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 사회가 수많은 아이에게 가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폭력과 그로 인한 심리적 황폐화를 고스런히 투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부모는 아니지만, 나이가 있다보니 아이를 키우는 학부모들과 대화할 기회가 종종 있습니다. 그들로부터 자주 듣는 고민 중 하나는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 아이가 공부는 곧잘 하는데, 기대만큼 사교적이지 않아서 걱정이에요.”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저는 우리 사회가 조용한 기질보다는 활달한 성향을 얼마나 더 높은 가치로 여겨왔는지를 새삼 절감합니다.



물론 부모님들께서는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염려였겠지만, 역설적이게도 아이들은 바로 그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본성을 지우는 첫 번째 ‘성격 성형’을 진행하게 됩니다. 제가 자기이해를 주제로 강의를 진행할 때 자주 인용하는 한 영상은 이 서글픈 현실을 시각적으로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영상에는 세 쌍둥이를 키우는 엄마가 등장합니다. 그녀의 고민은 본래 순했던 아들이 언제부턴가 부쩍 화가 많아졌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동발달심리학자는 제가 앞에서 소개한 기질 및 성격 검사(TCI)를 진행했습니다. 그 결과는 삼둥이 엄마가 말했던 것처럼, 순했던 아이는 다른 형제들에 비해서 자극 추구나 위험 회피 성향이 낮고 인내력이 높은, 이른바 ‘안정적이고 순한 기질’의 소유자였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문제는 바로 그 ‘순한 기질’에 있었습니다. 다른 형제들이 끊임없이 엄마를 찾으며 존재감을 드러낼 때, 순한 기질의 아이는 혼자 장난감을 가지고 놀거나 그림을 그리며 묵묵히 시간을 보냈습니다. 엄마는 아이를 방해하지 않는 것이 배려라고 생각했지만, 본능적으로 엄마의 사랑을 갈구할 나이의 아이의 입장에서는 그것은 배려가 아닌 ‘소외’이자 ‘단절’이었습니다.



결론은 명확하면서도 서글펐습니다. 아이는 어머니의 관심을 받고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타고난 순한 본성을 스스로 폐기하기로 한 것입니다. 아이는 날것의 순한 기질을 억누르고 ‘분노’라는 왜곡된 외피를 둘러썼습니다. 이것은 엄마의 사랑을 얻기 위해 기질을 배신하며 내지르는, 처절한 생존 신호이자 가면이었던 것입니다. 가장 안전해야 할 엄마의 품안에서조차 아이는 사랑이라는 보상을 받기 위해, 자기 자신의 원형을 지워버리는 가혹한 거래를 시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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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학창 시절을 아직까지 기억한다면 외향성 선호 현상이 우리 사회에 얼마나 뿌리깊게 내리고 있는지, 그래서 얼마나 많은 내향적인 성격을 지닌 아이들이 피해를 보는지를 떠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교실에서 말을 잘하고 발표를 많이 하는 친구들을 ‘인싸’라고 부르며, 반대로 조용히 책을 읽거나 혼자 점심을 먹는 아이들을 ‘아싸’라는 이름으로 낙인찍곤 했습니다. 이 두 단어는 원래 단순한 줄임말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인싸’는 성공적인 인간상으로 여겨지는 반면, ‘아싸’는 문제가 있는 성격이라는 프레임이 씌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말수는 적지만 사려 깊은 아이들은 “성격 좀 고쳐야지”, “왜 이렇게 소극적이야?” 같은 말들을 들으며 자신에게 뭔가 문제가 있다는 인식을 심게 됩니다.



이런 사회적 인식은 결국 내향적인 아이로 하여금 자신이 ‘있는 그대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고, 억지로 활발한 척, 활기찬 척, 사회적인 척하는 가면을 쓰게 만듭니다. 더 큰 문제는, 이 가면을 오래 쓰다 보면 정작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조차 혼란스러워진다는 점입니다. ‘나는 원래 말수가 적은데, 이건 게으른 걸까?’,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힘든데, 나에게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와 같은 자책은 내향적인 이들에게 자기 혐오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제가 지적하고 싶은 가장 큰 문제는 아이들이 이러한 가면을 쓰도록 만드는 주체가 바로 어른들과 그들이 만든 사회 시스템이라는 것입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 시스템은, 제가 앞서 언급했던, ‘테일러주의(Taylorism)’로 대표되는 공정의 효율성과 표준화를 근간으로 발전해 왔습니다. 프레드릭 윈슬로우 테일러(Frederick Winslow Taylor)가 주창한 소위 ‘과학적 관리법(Scientific Management)’은 모든 작업 규정을 규격화하고, 최소한의 시간으로 최대의 산출을 내는 ‘표준화된 인간’을 요구했습니다. 이러한 경영학적 논리는 산업 현장을 넘어 우리 사회 전체의 운영 원리로 자리 잡았습니다.



기업은 거대한 조직의 톱니바퀴로서 매끄롭게 소통하고, 지시사항을 빠르게 공유하며, 집단 속에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외향적인 성격을 지닌 적극적인 인재’를 이상적인 모델로 설정했습니다. 문제는 미국에서 발원하여 전 세계로 퍼져나간 이 시스템이, 전쟁 이후 뒤늦게 후발주자로 나선 한국에 상륙하면서 지극히 기형적이고 모순적인 형태로 변질되었다는 점입니다.



서구의 테일러주의가 품질과 효율이라는 명목 아래 말 잘듣는 규격화된 노동자를 양성하는 데 집중했다면, 한국식 테일러주의는 여기에 더해 방대한 지식의 압축 주입이라는 특수성을 가미하였습니다. 이 기형적인 시스템은 아이들의 기질이 내향적이든 외향적인든 모두를 고통의 굴레로 밀어 넣고 있습니다.



먼저 외향적인 기질을 타고난 아이들은 교실 안에서 자신의 에너지를 철저히 거세당합니다. 밖으로 뻗어 나가고 소통해야 할 그들의 본성은 ‘수업 방해’나 ‘산만함’으로 치부되어 ‘사회화’라는 명목으로 ‘내향형’ 가면을 쓸 것을 요구받습니다. 이들은 명문대 진학이라는 단 하나의 목표를 위해, 가장 활동적이어야 할 시기에 좁은 책상 앞에 갇혀 침묵 속에서 지식을 욱여넣는 ‘내향적 인내’를 강요받습니다. 외향적인 아이들에게 한국의 교실은 자신의 생동감을 죽여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거대한 감옥과 같습니다.



반면, 내향적인 아이들은 정반대의 폭력에 노출됩니다. 공부를 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정적인 기질이 유리한 것처럼 보이지만, 시스템은 이들에게 돌연 ‘리더십’과 ‘사회성’이라는 이름의 외향적인 가면을 요구합니다. 입시와 취업이라는 평가의 순간에 오면, 어제까지 침묵을 미덕으로 배우던 아이들에게 “왜 이렇게 소극적이냐”, “자신을 더 적극적으로 세일즈하라”라는 어른들의 다그침을 듣게 됩니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결국 제가 생각하는 한국의 교육 시스템은 외향인에게는 ‘내향적인 공부 기계’가 될 것을 강요하고, 내향인에게는 ‘외향적인 인싸’가 될 것을 강요하는 거대한 모순의 장입니다. 시스템이 규정해 놓은 ‘이상적인 인재상’이라는 좁은 틀에 맞추기 위해, 아이들은 자신의 타고난 기질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끊임없이 스스로를 깎아내고 부정해야 합니다. 결국 테일러주의적 표준화의 칼날은 아이들의 지식 수준뿐만 아니라,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기질마자도 효율성이라는 잣대로 재단하며, 우리 아이들 모두를 ‘자기 자신이 아닌 모습’으로 살아가게 만드는 비극을 낳고 있습니다.



청년들은 미완성인 채로 삶에 의해
이미 완성된 세계로 내던져지며, 그곳에서
억지로 성숙한 어른처럼 행동하도록 강요받는다.
―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




지금 저는 외향성 가면을 쓰는 것 자체가 무조건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냉정하게 말씀드리자면, 당신의 목표가 오직 ‘사회적 성공’에만 있다면 외향성이라는 옷을 입는 것은 목적지에 도달하는 가장 빠르고 효율적인 전략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본질적으로 복잡한 정보를 처리할 때, ‘휴리스틱(Heuristics)’이라고 부르는 직관적인 판단에 의존하는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 특히 타인에 대한 정보가 부족한 거대 도시와 냉혹한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우리는 누군가의 실력을 깊이 있게 파고들기보다는 눈에 보이는 단서로 그 사람 전체를 판단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예컨대, 아무리 실력이 뛰어난 돈가스집 사장님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튀긴 돈가스가 얼마나 맛있는지를 적극적으로 홍보하지 않으면 대중들은 그 맛을 알 길이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경쟁자가 즐비한 사회 시스템 속에서 외향성은 자신이라는 상품을 가장 빠르게 각인시키는 ‘마케팅 도구’가 됩니다. 당당한 태도, 거침없는 말솜씨, 활기찬 에너지를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그 사람이 유능할 것이라는 착각과 같은 ‘후광 효과(Halo Effect)’라는 인지적 오류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런 이유 때문에, 현대 사회와 같이 관계의 복잡성이 증가하고 정보가 넘쳐나는 환경일수록 ‘외향성’은 단순한 성격 특성을 넘어 하나의 ‘권력’이자 ‘스펙’이 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는 마치 수많은 식당이 난립하는 골목에서, 주인장이 묵묵히 돈가스 맛의 비법을 연구하는 것보다 온라인 플랫폼의 별점과 리뷰 관리에 더 사활을 거는 것처럼 말이죠. 본질적인 맛이 검증되기도 전에, 매력적으로 포장된 평판이 고객의 선택을 좌우하는 일명 ‘평판 경제’의 논리가 우리 성격의 영역에까지 침투한 것입니다. 결국 “나를 알리지 않으면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라는 강박은, 내향적인 기질일 지닌 저같은 사람들에게조차 외향성이라는 가면을 생존을 위한 가장 효율적인 ‘마케팅 도구’로 여기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경고하고 싶은 지점은 바로 이 부분입니다.
이 효율적인 전략이 사회적 승리의 훈장이 될 수 있을지언정,
내가 지금 가면을 쓰고 있다는 사실조차 망각한 채
고유한 기질과 동떨어진 모습으로 스스로를 벼려내는 삶은
결국 치명적인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냉정하게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당신이 선택한 그 가면이 생존을 돕는 유용한 ‘도구’인지, 아니면 당신도 모르는 사이 본질을 집어삼키고 당신의 진짜 표정을 지워버린 ‘얼굴’인지를 말입니다. 도구와 자아를 구별하지 못할 때 비극은 시작됩니다.



사이즈가 맞지 않는 신발을 신고 마라톤을 완주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듯이, 기질을 배신한 삶과 커리어는 당신을 깊은 고통과 소외로 몰아넣을 확률이 높습니다. 맞지 않는 신발을 억지로 신고 달릴 때 결국 말에 물집이 생기고 상처가 깊어지듯이, 기질에 어긋난 삶을 고집하는 대가는 우리 존재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부터 서서히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합니다. 그 균열은 처음엔 작은 피로로, 그 다음엔 원인 모를 무력감으로, 결국엔 당신의 삶 전체를 송두리째 흔들어놓은 거대한 폭풍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이것은 비단 저만의 개인적인 고백이나 짐작이 아닙니다. 실제로 심리학계와 의학계에서는 자기 기질을 억압하고 사회적 요구에 자신을 끼워 맞추는 행위가 우리 몸과 마음에 얼마나 파괴적인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수많은 증거를 내놓고 있습니다.



다시금 강조하건대, 외향성이라는 가면이 사회적 승리의 훈장이 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당신의 기질이라는 선천적인 뿌리와 충돌하기 시작할 때, 당신의 존재는 뿌리부터 서서히 병들기 시작합니다. 지금 제가 ‘병이 든다’라고 표현한 것은 단순히 감상적인 비유가 아닙니다. 당신이 기질을 외면한 채 살아간다면, 당신의 몸과 마음이 실제로 망가진다는 것을 시사하는 연구 결과들이 많습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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