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파이데이아
오이디푸스 왕 (Oedipus Tyrannus)
소포클래스의 오이디푸스 왕은 비극의 주요한 요소인 발견과 급반전이라는 요소를 갖추고 있어 비극 작품이 걸작이라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밝히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오이디푸스는 비극의 모든 요건을 갖춘 가장 짜임새 있는 드라마‘
이 비극을 읽고 다음 질문에 대한 나름의 해석을 얻었다면 성공일 듯 싶다
오이디푸스는 누가인가/무엇인가?
오이디푸스가 밝혀낸 근원은 무엇인가?
오이디푸스의 하마르티아는 무엇인가?
오이디푸스 이후 인간의 수수께끼는 무엇인가?
다 읽은 후 정말 쉽게 질문에 대해 답하기 어려웠다. 이래서 고전은 한번 읽어서는 다 이해했다고 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싶다.
사실 이 비극을 읽으면서 내내 신탁(주어진 운명)을 거스를 수 없는 나약한 인간의 모습에 내내 마음이 불편했는데 읽을수록 왜 오이디푸스 왕이라는 비극 작품이 훗날 여러 학자들에게 모티브를 주고 지금까지도 읽어야 하는 비극으로 손꼽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비극은 청중이 있는 극이고 이 비극에서 오욕, 오염을 씻겨 내야 나라에 돈 역병을 해결할 수 있다고 얘기된다. 여기서의 오욕을 씻을 수 있는 길이란 라이오스를 죽인 자를 찾아서 추방하거나 피로 갚으라는 신탁을 실행하는 일이다.
카타르시스의 어원이 오욕을 씻어낸다는 뜻이 있다고 하는데 이 비극을 보는 청중들이 오욕을 씻어내기 위한 과정을 보면서 카타르시스를 느꼈을까?
[카타르시스_출처: 나무위키]
'카타르시스'란 독자 내면에 방치된 채로 썩어가던 상처를 픽션의 비극을 통해 직면하고 비로소 하지 못했던 슬퍼함을 통하여 치유하는 것을 의미한다.
주인공이 당하는 '비극'에 공감하게 되면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거나, 주인공을 옹호하며 화를 내면서 자신의 감정을 폭발적으로 드러내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감정이 정화됨을 느끼는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화를 내고 나면 답답한 감정이 가시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것처럼, 눈물을 흘리고 나면(또는 비극의 슬픔에 잔뜩 공감을 하고 나면) 자신 내면의 슬프고 우울한 감정이 제법 치유되는 걸 느낄 수 있는데, 이를 카타르시스라고 하는 것이다.
인간의 운명은 일정 부분 신들이 정해 놓았지만 인간의 가지는 욕망이 이 극을 끌어가고 있다고 생각이 된다.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려는 의지를 가진 오이디푸스, 상을 받고 싶은 사자, 연민의 마음을 가지는 목자, 자식을 지키기보다는 신탁을 따르지만 신탁을 믿고 싶지 않은 테이레시아스 등 등장인물들의 다양한 욕구들이 결합되어 이야기를 구성해간다.
처음에는 신탁(운명)을 거스를 수 없는 나약한 인간에 대한 연민이 느껴졌다면 그 운명을 알고 받아들이는 인간의 자세와 태도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된다. 나라를 위해 백성을 위해 오욕을 씻어내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가지고 시작된 오이디푸스의 범인 찾는 과정은 결국 자신이 범인임을 밝히고 받아들어야만 하는 극의 흐름을 가지고 있다. 이미 청중들은 오이디푸스가 범인인 것을 알고 있고 그 진실을 찾아서 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모든 정황과 상황들이 오이디푸스가 범인임을 가르키고 오이디푸스 본인 조차 그 사실을 직감하지만 끝까지 묻고 진실을 밝히는 것을 선택한다.
내가 만약 그런 상황이라면 어떠했을까? 운명을 감추려 했을까? 그 사실을 덤덤히 받아들기고 파국으로 들어갈 수 밖에 없는 선택을 할 수 있는 인간이 얼마나 될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내가 할 수 없는 저 선택을 오이디푸스가 하고 그 과정을 통해서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줄거리가 진행되면서 오이디푸스의 질문은 다음과 같이 변화된다.
’누가 라이오스를 죽였는가? ‘
‘내가 라이오스를 죽였는가?’
’나는 누구인가?‘
’누가 라이오스를 죽였는가?‘ 라는 마음의 오이디푸스는 거침없는 구원자의 모습을 보이다가
”행동을 두러워 않는 자는 말도 두려워 않는 법이오“(296행)
’내가 라이오스를 죽였는가?‘ 의 마음이 들 때는 한없이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보인다.
”나로서는 시인도 부인도 할 수 없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불안한 예감에 안절부절 못하는 이 마음, 현재도 미래의 일도 보지 못하네“(485~490행)
”그 예언자가 장님이 아니지 않았나 몹시 두려워요“(747행)
”세상에 나보더 더 비참한 자가 어디 있을 것이며, 나보다 더 신에게 미음을 받는 자가 어디 있소?“(815~816행)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물음에 대한 오이디푸스는
”그리고 나는 듣지 않을 수 없고, 그래도 기어이 들어야겠다“
아내의 황금 브로치로 자신의 눈을 멀게 하고 나라에서 추방될 수 있도록 크레온에서 간청하고 자식을 부탁한다.
”너희는 이 아비보다는 나은 삶을 살게 해달라고 말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마지막 오이디푸스의 말에 크레온은 이렇게 답한다.
”모든 일을 지배하려 들지 마세요, 그대가 지배한 것들도 평생토록 그대를 따르지 않았어요“(크레온, 1521~1522)
이 작품이 최고의 작품으로 인정받는 대는 수사극으로서의 극의 흐름이나 여러 장치들이 있겠지만 이 작품을 통한 독자의 해석이 아닐까 싶다.
첫째, 인간의 이성에 대한 경계
소포클레스가 살고 있던 그리스의 시대적 배경을 이해한다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겠지만 자신에게 내려진 신탁을 거스르고자 별들을 보고 멀리서 그것의 위치를 재면서 떠나왔지만 결국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왔고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어서 구원자가 되었지만 자신 스스로의 운명을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둘째, 운명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자세
”그 재앙들은 이외의 것이 아니라 계획된 것인데,
스스로 가한 것으로 보이는 고통이 가장 안쓰럽지요“(코러스장 1230~1232)
운명이 정해져 있다면 그 운명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의 인간의 태도가 결국에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신탁을 거부하고 스스로 선택하고 개척하려는 오디오푸스, 자신이 범인이라고 알고 있지만 묵묵히 그 진실을 밝히는 것을 선택한다.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눈을 찌르고 국가에서 추방되는 것을 선택한다. 운명이 가혹하더라도 내 삶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이라는 얘기를 해주고 싶었던 것일까?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함께 사며 자식을 낳는 운명을 거스를 수 없지만 이러한 가혹한 운명을 받아들이고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을 해나가는 인간의 존엄성, 인간의 존재 이유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셋째, 인간의 불행과 행복에 대한 생각의 전환
”인간 종족이여, 헤아리건데, 그대들 삶은 한낱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구나,
누가 대체 행복으로부터, 잠시 어른거리다 사라져버리는 행복의 그림자보다
더 많은 것을 얻는가?
그러니 불행한 오이디푸스여, 내 그대의 운명을 거울삼아 인간들 중 어느 누구도 행복하다고 기리지 않으리(1187~1195)“
”필멸의 인간은 어느 누구도 행복하다고 기리지 마시오.
그가 드디어 고통에서 해방되어 삶의 종말에 이르기 전에는“(코로스, 1329~1530)
엄청난 부와 명예를 다 가졌지만 한 순간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인간으로 변화되는 과정을 보면서 인간의 느끼는 행복과 불행이라는 것은 왔다가 가는 것이고 돌고 도는 것이니 순간의 감정에 너무 휘둘리지 말고 그것이 영원할 것이라는 히브리스(오만)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지 않나 싶다.
마지막으로 스핑크스 수수께끼를 통해 이 작품이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가 내는 2가지의 수수께끼를 풀었다고 한다.
“아침에는 네 다리로 낮에는 두 다리로, 밤에는 세 다리로 걷는 짐승이 무엇인가?”
“그건 사람이다. 사람은 어렸을 때 네 다리로 기고, 자라서는 두 발로 걷고, 늙어서는 지팡이를 짚어 세 다리로 겉기 때문이다.”
“언니가 동생을 낳고 동생이 언니를 낳는다. 다음날 언니가 동생을 잡아먹고 죽은 동생이 다시 나타나 언니를 잡아먹는다. 이 자매는 누구인가?”
“낮과 밤.”이래. 그 낮의 여신 헤메라와 밤의 여신 닉스.
인간에 대한 존엄을 지키고 이성과 힘에 대한 경계, 행복과 불행의 영원성에 대한 경계를 말하고 싶지 않았을까?
2023. 8. 8(화) 파이데이아_소포클레스 비극 전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