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크 일리치
‘피자헛’ ‘도미노 피자’와 함께 미국 3대 피자 기업으로 꼽히는 ‘리틀 시저스(Little Caesars)’의 창업주이자 프로야구단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의 구단주 마이크 일리치(Mike Ilitch)가 2017년 2월 3일 별세했다. 향년 88세.
일리치는 동네 피자가게를 세계 19개국의 글로벌 피자 체인, 식자재 유통기업, 스포츠 구단, 카지노, 호텔을 아우르는 거대 기업으로 키워낸 대표적인 미국 경영인이다.
세계에서 가장 큰 테이크아웃 피자 체인인 리틀 시저스는 미국에만 4000개 이상의 매장을 운영 중이다. 2015년 매출액 34억 달러(약 3조 9100억 원)를 기록했다. 현재 일리치 가족들이 운영하는 기업들의 직원만 2만 3000명에 이른다.
일리치는 1929년 미시간 주의 ‘자동차의 도시’ 디트로이트에서 동유럽 마케도니아 출신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공구 제작자였다. 일리치는 디트로이트 쿨리 고교에서 야구 선수로 활약했다.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고 고교 졸업 이후 해병대에 입대해 4년 동안 복무했다.
전역한 뒤 1952년 계약금 3000달러를 받고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에 입단했다. ‘메이저리거’를 꿈꾸며 유격수, 2루수로 뛰었다. 그러나 마이너리그에만 머무르다 결국 무릎 부상으로 1955년 선수 생활을 접어야 했다.
일리치는 같은 마케도니아 이민자 가정 출신의 아내 마리안(84)과 함께 1959년 디트로이트 인근 소도시 가든시티에 작은 피자가게를 열었다. ‘리틀 시저’라는 이름은 마리안이 남편 마이크를 그렇게 생각해 붙였단다. 마리안의 아버지는 음식점을 운영했다.
마리안은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이민자 가정에서 자랐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냅킨, 소금, 후추 등을 용기에 채우는 등 음식점의 허드렛일을 도맡았다. 어릴 때부터 장사에 대한 감각을 키울 수 있었던 셈이다.
마리안은 고교를 졸업한 뒤 전문대학에 해당되는 데어본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회계학을 공부했다. 그의 경험은 일리치 부부의 피자 가게에 큰 자산이 될 수 있었다.
리틀 시저스 첫 매장은 장사가 잘 됐다. 일리치 부부는 프랜차이즈를 통해 매장을 확장하기로 결심했다. 1950~60년대는 대형 피자 프랜차이즈 기업들이 속속 창업하던 시기였다. 피자헛은 1958년 캔자스 주 위치타, 도미노는 1960년 미시간 주 입실랜티에 첫 매장을 열었다.
일리치는 1962년 미시건 주 워런에 첫 프랜차이즈 매장을 열었다. 1967년 디트로이트 시내에도 진출했고 1969년 50호점과 해외 첫 매장인 캐나다 매장을 개점할 수 있었다.
미국 3대 피자 기업은 국내 피자 시장의 40%를 장악하고 있다. 하지만 세 기업은 저마다 다른 독특한 판매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피자헛은 ‘다양한 메뉴’, 도미노는 ‘빠른 배달’, 리틀 시저스는 ‘싼 가격’을 강점으로 내세운다.
일리치는 식자재 구매부터 피자 판매가지 최대한 비용을 줄였다. 1971년 피자에 많이 사용되는 버섯의 품질과 원가 절감을 위해 버섯농장을 인수했다. 다른 식자재 공급까지 직접 맡아서 원가 비중을 최대한 낮췄다.
1979년 피자 2개를 하나의 가격으로 파는 반값 할인 정책을 내놓으며 소비자를 모았다. 미국 내에선 꽤나 알려진 ‘PIZZA! PIZZA!’ 광고 문구도 만들었다. 1988년 ‘Pan! Pan!’으로 불리는 정사각형의 두꺼운 피자를 출시했고 소비자들이 여러 가지 크기, 모양의 피자를 선택할 수 있도록 다양한 메뉴도 만들었다.
TV 광고에도 나섰다. 리틀 시저스는 저가 마케팅 전략 등에 힘입어 사세를 키웠고 1987년까지 미국 50개 주 전역에 매장을 늘렸다. 1990년대부터는 종합 소매점 체인 K 마트 매장에도 매장을 입점시켰다. 2008~2015년에는 매장이 가장 많이 늘어나는 피자 체인으로 꼽혔다.
승승장구하는 사업으로 여윳돈이 생긴 리틀 시저스는 1989년 디트로이트 시내의 10층짜리 옛 폭스 극장을 인수해 본사가 입주했다.
일리치는 사업이 순항하자 고향 디트로이트에 뭔가 기여하고 싶었다. 디트로이트는 1950년대 후반 GM(제너럴모터스) 포드 크라이슬러 등 자동차 기업들이 다른 도시에도 공장을 짓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도시는 활력을 잃었다.
일리치는 스포츠 사업으로 디트로이트 시민들에게 큰 위안을 주고 싶었다. 1982년 어려움을 겪고 있던 프로 아이스하키 구단 디트로이트 레드윙스를 인수했다. 당시 레드윙스의 성적은 하위권을 맴돌아 ‘데드 윙스’로 불릴 정도였다. 시민들도 아이스하키에 별 다른 관심이 없었다.
미국 프로스포츠 구단들을 기업의 관점에서 철저하게 수익을 따진다. 하지만 일리치는 애초부터 수익과는 무관한 구단주였다. 그는 승리만을 추구하는 진정한 스포츠맨이었다. 1983년 드래프트에서 캐나다 출신의 스티브 아이 저 맨을 뽑아 20년 이상 주장을 맡기고 팀의 리더로 성장시켰다.
아이 저 맨은 북미아이스하키리그(NHL) 사상 최고의 리더라는 찬사를 받았다. 동구권, 북유럽권 선수들도 대거 영입했고 몬트리올 캐나디언스 감독을 지낸 명장 스카티 바우만을 영입해 1997, 1998년 스탠리컵(NHL의 플레이오프 우승)을 거머쥐었다.
2004년 1600만 달러(약 184억 원)의 운영적자에도 불구하고 레드윙스는 ‘가장 가치가 높은 팀’으로 꼽혔다. 스탠리컵은 2002, 2008년에도 받았다. 일리치는 2003년 NHL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고 디트로이트 시민들은 도시가 ‘하키 타운’으로 불릴 정도로 아이스하키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1992년에는 자신이 마이너리그 선수로 뛰었던 디트로이트 타이거스를 피자 업계 라이벌인 도미노 피자의 창업주 톰 모나한에게 8500만 달러(약 978억 원)를 주고 인수했다. 1901년 창단된 디트로이트 타이거스는 아메리칸리그에서 가장 먼저 설립된 8개 구단 중 하나 월드 시리즈 4번, 리그 11번의 우승을 한 명문 구단이다. 일리치에게 야구는 필생의 꿈이었다.
그는 자신이 대부분의 돈을 들여 1912년부터 사용하던 낡은 주경기장을 대신 2000년 코메리카파크에 새 경기장을 열었다. 일리치는 개인 재산을 털어가며 유명 선수들을 영입했다. 그는 단장, 감독에게 “돈은 신경 쓰지 말라. 최고의 선수만 데려오라"라고 지시했다.
일리치의 적극적인 투자로 디트로이트 타이거스는 2011~2014년 4년 연속 아메리칸리그 중부지구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타이거스는 2006년, 2012년 아메리칸리그 챔피언에도 올랐지만 끝내 월드 시리즈 우승은 해내지 못했다. 일리치는 “죽기 전 월드 시리즈 우승을 보는 게 마지막 소원”이라고 말했으나 그 꿈을 이루지 못했다.
일리치의 아들 크리스토퍼는 아버지가 사망한 뒤 성명을 내고 “그는 스포츠와 비즈니스, 지역사회에 매우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디트로이트에 대한 열정, 타인에 대한 관용, 가족과 친구들에 대한 헌신을 우리는 기억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리치는 스포츠계는 물론 지역사회, 스포츠 팬 등 모두의 존경을 받았던 흔치 않는 구단주 중 하나였다. 2009년 디트로이트에 본사를 둔 GM이 파산 위기에 직면해 타이거스의 홈구장인 코메리카파크 애 광고를 할 수 없는 처지에 놓였다.
일리치는 다른 기업들의 광고 제안을 뿌리치고 광고료가 가장 비싼 구단 외야 중앙에 GM의 광고판을 무료로 세워줬다. GM은 디트로이트의 경제를 지탱하는 대표적인 지역 기업이기 때문이다.
일리치는 돈을 많이 번 만큼 사회 공헌에도 힘쓰며 ‘노블레스 오블리주(사회적 신분에 걸맞은 도덕적 의무)’를 실천했다. 디트로이트 레드윙스를 인수한 뒤 아이스하키 청소년 선수를 육성하기 위해 리틀 시저스 아마추어 하키 리그를 출범시켰다. 이 리그는 현재 가장 존경받는 청소년 하키 리그로 성장했다.
1985년에는 푸드트럭 ‘리틀 시저스 러브 키친’을 만들어 노숙자, 저소득층, 재난피해자 등 사회적 약자들에게 무료로 피자를 나눠주기도 했다. 이런 공고로 리틀 시저스는 1991년 당시 조지 H.W. 부시 대통령에게 자원봉사상을 받는 등 여러 차례에 걸쳐 봉사상을 수상했다.
메이저리그 구단주로 변신한 ‘마이너리거’ 일리치의 꿈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이유종 동아일보 기자 pe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