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펜서 헤이즈
미국 ‘세일즈맨의 신화’인 출판기업 사우스웨스턴컴퍼니의 대주주 스펜서 헤이즈가 2017년 3월 1일 뉴욕 장로교병원에서 뇌동맥류 파열로 별세했다. 향년 80세.
헤이즈는 대학생 시절 생계를 위해 말단 외판원에 뛰어들었다가 출판 및 의류기업 경영인, 대주주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다. 아내와 함께 미술품 수집에도 관심을 보여 미술계에서 손꼽히는 ‘아트 컬렉터’로 불렸다.
그는 생전에 자신이 모은 미술품의 대부분을 프랑스 파리 3대 미술관 중 하나로 꼽히는 오르세 미술관에 기증했다. 그가 기증한 미술품은 야수파(포비슴) 운동을 주도한 프랑스의 화가 앙리 마티스 등의 작품 600점이다. 기증 미술품의 가격을 합치면 3억 1500만 파운드(약 4400억 원)에 달한다.
헤이즈는 1936년 미국 오클라호마 주 시골마을인 아드모어에서 태어나 텍사스 주 게이네스빌로 이주해 성장했다. 가난한 집에서 아버지 없이 어머니, 할머니의 손에서 자랐다. 키도 작은 편이었다. 하지만 불리한 신체 조건에도 불구하고 농구를 매우 잘했고 고교생 시절 ‘농구 스타’로 불렸다. 대학(텍사스크리스천대)도 농구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헤이즈는 만 19세에 아내 마를린과 결혼했다. 당장 생활비가 필요했고 대학생이던 1956년 출판기업 사우스웨스턴에 성경 외판원으로 나섰다. 사우스웨스턴은 방학 동안 ‘가가호호’ 방문해 책을 팔고 수수료를 받을 대학생을 모집했다. 그는 탁월한 세일즈맨이었다.
1959년 대학 졸업 후 정식으로 사우스웨스턴에 입사해 판매하는 책의 종류를 성경에서 참고도서, 요리책, 아동도서로 대폭 늘렸다. 입사 7년 만인 1966년 만 30세 때 판매담당 부사장에 올랐다. 젊은 나이에 임원에 오른 그는 책뿐만 아니라 병원 바닥재, 암 보험 등으로 사업을 확대했다.
헤이즈는 1855년 테네시 주 내슈빌에 설립된 전통의 출판기업 사우스웨스턴에게 ‘꼭 필요한 인재’였다. 사우스웨스턴의 사주는 그를 영원히 붙잡고 싶었다. 사주는 1960년대 회사 주식의 12%를 5만 달러에 헤이즈에게 넘겼다. 사우스웨스턴의 사업은 날로 번창했다.
1969년 사우스웨스턴은 기업공개(IPO)를 통해 미 서부 유력지 로스앤젤레스타임스를 소유한 타임스미러에 1700만 달러에 인수됐다. 헤이즈는 주식 매매로 200만 달러를 받았고 이후에도 경영진으로 남아 1973년 사장에 취임했다.
그러나 그는 곧 기업공개를 후회했다. 기업공개로 많은 주주들이 회사 경영에 간섭했고 회사 운영에 오히려 방해가 됐다.
그는 기업공개를 통해 큰 돈을 벌고 개인의 재무 위험부담까지 줄이는 일반적인 기업인들과는 정반대의 길을 택했다. 1982년 헤이즈는 타임스미러에 주식을 자신에게 매각하라고 요청했다. 당시 사우스웨스턴은 매년 3000만 달러 이상의 매출을 기록하고 있었다.
헤이즈는 은행 등에서 2700만 달러를 빌려 사우스웨스턴을 인수했다. 1983년부터는 이사회 의장도 맡았다. 그는 빌린 돈을 4년 만에 모두 갚았고 사우스웨스턴의 매출액은 1억 5000만 달러로 크게 늘었다.
사우스웨스턴은 1996년 매출액 6억 달러를 기록할 정도로 고속 성장을 구가했고 당시 헤이즈의 개인 재산은 4억 달러(약 4600억 원)에 달했다.
전통의 출판기업인 사우스웨스턴은 독특한 기업 문화를 갖고 있었다. 대부분의 제품을 중간 도매상 등 유통망에 의존하지 않고 자체 영업사원을 통해 팔았다. 세일즈맨 교육은 매우 중요했다. 신입 영업사원들은 1주 동안 군대의 신병훈련에 준하는 교육 과정을 마쳐야 했다.
회사는 판매 노하우를 알려준다. ‘자신의 제품에 대해 강한 신념을 갖도록 한다. 항상 몸을 움직이고 주 6일 동안 근무해야 한다’ 등 ‘시대 불문’ 외판원의 원칙을 교육했다.
대학생 외판원부터 출발한 헤이즈는 다양한 소비자를 만나며 그들의 심리 등 요구 사항을 꿰뚫었다. 숱한 현장 판매 경험을 통해 영업의 본질은 사람 그 자체라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소비자의 마음을 얻어야 제품도 팔 수 있다는 거였다. 헤이즈의 오랜 친구인 윌리엄 터커 텍사스크리스천대 전 명예총장은 “스펜서가 파는 것은 제품이 아니라 사람 그 자체였다”고 말했다.
그는 판매 노하우를 후배들에게 가르치는 데도 일가견이 있었다. 소비자들과의 소통, 연락 방법 등을 세세하게 알려줬다. 직원들에게 “비즈니스는 기술과 사람들의 태도의 반영이다. 인간관계만 만들 수 있다면 비즈니스를 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부하직원 관리에도 탁월했다. 그는 ‘사람들은 관리를 받기보다는 이끌리는 것을 더 원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슬럼프를 겪고 있는 직원들을 격려하기 위해 함께 오랫동안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랠프 모슬리 사우스웨스턴 전 회장은 “1970년대에도 헤이즈는 부활절 주말에 가족을 내슈빌에 놔두고 인디애나까지 인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떠나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헤이즈는 직원에게 동기부여를 하는 방법도 잘 알고 있었다. 직원들이 주인의식을 가질 수 있도록 평사원들도 주식을 가질 수 있도록 했다. 자신이 물러나면 아내와 두 딸 대신 직원들이 회사를 물려받을 것이라고 공언했다.
퇴직한 직원까지 챙겼다. 옛 영업직 직원들을 위해 부자들에게 부동산컨설팅을 해주는 회사를 세웠다. 그는 이 회사가 성장하도록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지만 회사의 지분은 적게 가졌다. 이 회사는 1990년대 이미 400만 달러 이상의 매출을 올렸고 수익성도 매우 좋게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그는 탁월한 영업력을 바탕으로 사우스웨스턴과 별도로 1966년 남성 정장 판매회사인 ‘톰제임스’를 세웠다. 그는 영업할 때 옷차림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체득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옷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늘 바빴던 헤이즈는 ‘왜 직장에서 바쁜 남성들이 꼭 매장에서만 옷을 구입해야만 하는 것일까’라는 의문을 가졌다. 그는 사무실, 집에서도 남성 정장을 구매할 수 있도록 방문판매를 고안했다. 그는 방문 판매에는 도가 튼 상태였다. 1967년에는 출판업에서 확대해 미국에서 가장 큰 스포츠 잡지 출판사인 애슬론스포츠커뮤니케이션을 세웠다.
1994년 남성 정장을 제작하는 옥스퍼드의류(Oxxford Clothes Inc.)를 인수해 톰제임스에 힘을 실어줬다. 1916년 설립된 옥스퍼드 의류는 기성복 정장의 가격이 2000달러부터 시작되는 고급 정장 제작회사다. 그는 양복은 잘 만들지만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크고 작은 양복점도 인수했다.
재단사들의 일자리를 살린 셈이다. 헤이즈는 “우리는 직업의 안정성을 사회에 빚지고 있다”고 말했다. 1990년대 헤이즈의 회사들은 연평균 30% 이상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사우스웨스턴은 출판뿐만 아니라 교육 여행 등을 아우르는 10여 개의 기업집단으로 성장했다.
2016년 10월 22일 프랑스 대통령의 집무실이 위치한 엘리제궁. 헤이즈 부부는 마티스 등 명화 600점을 프랑스 정부에 기증하며 “우리는 이 작품들이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을 수 있는 곳에 주기로 했다”고 말했다. 헤이즈 부부의 기증품은 지난 반세기 가까이 모은 그림들이다.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외국인이 가장 큰 규모로 미술품을 기증했다”고 말했다.
헤이즈 부부는 1971년 처음으로 파리를 방문했고 이후 미술품 수집을 시작했다. 이들 부부는 “우리는 미술 교육을 잘 받은 사람은 아니었으나 우리가 좋아하는 작품을 구입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1723년에 건립된 파리의 누아르무리에저택(1996년부터 프랑스 문화부 청사로 사용)을 본떠 지은 내슈빌 자택에 수백 점의 미술품들을 전시했다.
헤이즈 부부는 지난해 4월 오드레 아줄래 당시 프랑스 문화부 장관을 만나 “우리가 원하는 것은 이 작품들이 절대 팔리지 않았으면 하는 점이다. 또 수장고에 처박혀 있지 않아야 하며 항상 벽에 걸려 있기를 바란다”며 기증을 약속했다.
이들 부부는 미국의 대형 미술관들도 자신들의 작품을 충분히 수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다만 수집한 작품들이 대부분 프랑스 화가의 작품이기 때문에 오르세미술관에 기증한다고 밝혔다. 오르세미술관 방문객(연 400만 명) 중 3분의 1은 미국인이다.
이유종 동아일보 기자 pe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