댄 루니
미국 프로미식축구리그(NFL) 피츠버그 스틸러스의 구단주 댄 루니가 2017년 4월 13일 별세했다. 향년 85세. 루니는 스틸러스에 합류한 뒤 양대 콘퍼런스(리그) 우승 팀이 겨루는 슈퍼볼(챔피언 결정전)에서 NFL 32개 구단 중 최다 6번 우승하며 ‘스틸러스의 황금시대’를 일궈냈다. 가장 성공한 스포츠 경영인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스틸러스는 루니가 합류한 뒤 디비전(지구) 우승 22번, 아메리칸풋볼콘퍼런스(AFC) 우승 8번을 차지했다. AFC는 내셔널 풋볼 콘퍼런스(NFC)와 함께 NFL를 구성하는 양대 콘퍼런스 중 하나다. 루니는 반세기 동안 NFL에 헌신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0년 오하이오 주 캔턴에 마련된 NFL 명예의 전당(1962년 설립)에 이름을 올렸다.
루니는 1845~50년 아일랜드에서 발생한 감자 대기근을 피해 펜실베이니아 주 피츠버그에 정착한 이민자 집안의 후손이다. 그의 아버지 아더(1901년 출생)는 조지타운대 체육 장학생에 뽑힐 정도로 스포츠를 매우 사랑한 인물이었다.
아더는 대학 졸업 후 권투, 야구, 미식축구 선수로 활약하다 1920년대 피츠버그에서 활동하던 준프로 미식축구 구단인 마제스틱 라디오(호프 하비라는 이름으로 1921년 설립)에 들어갔다. 선수 겸 코치, 스카우터 등의 역할을 하다 1920년대 후반 아예 구단을 인수했다.
1930년대 초반 피츠버그에서 미식축구가 큰 인기를 누리진 못했다. 하지만 아더는 미식축구의 잠재력을 간파하고 1933년 2500달러의 가입비를 내고 마제스틱 라디오를 NFL 소속 구단에 등록했다. NFL에 가입하면서 구단 이름은 피츠버그 파이러츠(1940년 피츠버그 스틸러스로 개명)로 바꿨다.
당시 NFL의 사정은 열악했다. 1929년 대공황 이후 구단들은 별다른 수익을 내지 못했다. 이 때문에 오랜 기간 생존 자체를 위협받아야 했다.
1932년 7월 태어난 루니는 스틸러스와 함께 성장했다. 9세 때 이미 라커룸(선수 탈의실)에서 허드렛일을 맡는 '워터보이'가 됐다. 라커룸을 청소하거나 선수 헬멧에 페인트를 칠하기도 했다. 루니는 “라커룸에 있는 것 자체가 언제나 즐거웠다. 시키는 일은 뭐든지 했고 스틸러스 선수들과 함께 빈둥거리기도 했다. 나는 이미 스틸러였다”고 회상했다.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자란 루니는 한 때 성직자의 길을 고민했다. 하지만 고교(피츠버그 노스가톨릭고교) 시절 이미 미식축구팀에서 쿼터백(공격팀의 일원) 선수로 경기장을 누볐다. 듀케인대에서 회계 전공으로 학사 학위를 받은 뒤 1960년부터 본격적으로 구단 일을 맡았다. 처음 맡은 역할은 인사 담당 이사였다.
아버지 아더가 이끌던 스틸러스의 성적은 오랫동안 좋지 못했다. 1947년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게 최고의 성적이었다. 루니는 열린 마음을 가지고 실용적이며 효율적인 경영을 추구했다. 오랜 고민 끝에 그는 성적 부진의 해결책은 결국 사람에 달렸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후 우수한 감독, 코칭 스태프와 선수 발굴에 주력했다.
1960년대는 미국의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박사가 활발하게 활동할 정도로 미국에선 인종 차별 문제가 상당했다. 스포츠 구단들도 피부색을 감안해 선수를 선발했다.
루니는 스포츠 전문가인 빌 넌(피츠버그쿠리어의 스포츠 담당 편집장)의 조언을 경청했고 1967년 NFL 구단 중 처음으로 흑인 임원을 고용했다. 흑인 임원은 흑인들이 주로 다니는 대학에서 경기력이 우수한 흑인 선수를 발굴했다.
루니는 훗날 자서전에 “피부색, 발음, 종교는 중요하지 않다”며 “자신의 말을 실천하고 자신의 몫을 제대로 하며 친구들을 배려하는 심성을 가졌는지가 중요할 뿐이었다”고 썼다.
그는 NFL에 소수인종의 선발을 배려한 규정인 ‘루니 룰(Rooney Rule)’을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2002년 토니 던지 탬파베이 버캐니어스 감독과 데니스 그린 미네소타 바이킹스 감독이 좋은 성적을 내고도 해임됐다. 두 감독 모두 흑인이었는데, 논란이 크게 일었다.
흑인 인권단체들은 구체적인 통계를 들며 NFL 구단들이 흑인 감독을 백인 감독 보다 쉽게 해임하며 아예 임용 자체를 기피한다고 반발했다. 명백한 인종 차별이라고 지적했다. 루니는 다른 구단주들을 설득해 감독을 새로 영입할 때는 반드시 한 명 이상의 소수계를 후보군에 넣어야 한다는 규정을 만들었다.
루니 룰이 시행된 뒤 NFL에서 흑인 감독은 6%에서 22%로 껑충 뛰었다. 스틸러스는 2007년 흑인인 마이크 톰린을 감독으로 선임했다.
루니는 선수들과 별다른 개인적인 접촉을 하지 않는 일반적인 구단주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그는 다른 코칭 스태프들처럼 오전 8시 15분까지 훈련장에 출근했고 선수들의 훈련을 직접 지켜봤다. 점심에는 선수, 직원들과 함께 식사했다. 구단이 다른 도시로 원정 경기를 떠날 때는 함께 비행기를 탔다.
케이지 햄튼(스틸러스 선수 출신)은 2009년 뉴욕타임스(NYT)와의 인터뷰에서 “많은 구단주들은 취미 삼아서 스포츠 구단을 운영한다. 그러나 루니는 그렇지 않았다. 매일 선수들의 이름을 직접 불렀다. 아내, 여자친구, 자녀, 부모님의 근황을 직접 물었다”고 말했다.
어떤 선수들은 루니의 휴대전화 번호까지 알았고 구단주 사무실에서 낮잠을 자기도 했다. 루니는 스틸러스를 떠난 선수들마저 끝까지 품었다. 앤디 러셀은 NYT에 “나는 13년 동안 스틸러스에서 뛰었다. 이후 30년 동안 다른 일을 했다. 하지만 지금 스틸러스 선수들을 만나도 우리는 여전히 형제들이다”고 말했다.
그의 휴먼 리더십은 스틸러스에 깊숙이 스며들었다. 프로 스포츠 선수들은 성적에 따라 연봉이 책정된다. 개인의 성과에 매우 민감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스틸러스 선수들은 개인의 성과만을 위해 뛰지 않았다. 개인의 성적을 높이기 보다는 팀의 승리를 위해 뛰었다. 이런 분위기가 이어지면 구단은 큰 그림을 그리며 안정적으로 성적을 끌어올릴 수 있다. 위기 돌파력도 강해진다.
루니는 항상 선수들에게 업계 최고의 연봉을 제시하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스틸러스에는 좋은 선수들이 많이 남았다. 루니는 연봉 협상에서 “우리는 당신이 스틸러스에 남아 있기를 원한다. 우리는 당신이 꼭 필요하다. 우리는 당신이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런 심금을 울리는 말은 선수들의 마음을 흔들었고 돈을 더 준다고 해도 다른 구단에 가기 어렵게 만들었다.
인간적인 스틸러스의 문화는 성과로 이어졌다. 스틸러스는 1960년대 후반부터 팀 성적이 오르며 1972년 디비전에서 첫 우승을 차지했다. 1974년에는 리그(AFC) 우승컵과 슈퍼볼 우승을 거머쥐었다. 1975년 구단 사장에 취임한 루니는 이후 5번이나 더 롬바르디컵(수퍼볼 우승컵)을 차지했다.
루니는 NFL의 위기에서 해결사 역할을 톡톡히 하는 미식축구계의 진정한 리더였다. 1920년 오하이오 주 캔턴에서 미국프로미식축구협회로 출발한 NFL은 현재 32개 구단이 가입돼 있다. 미식축구는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로 성장했다. 하지만 그 과정은 사실 녹록하지 않았다.
1930~40년대에는 어메리칸풋볼리그, 전미풋볼콘퍼런스 등 경쟁 미식축구 리그가 등장했다. NFL은 1950년대에 들어서야 북미에서 독점적인 프로 미식축구리그로 자리매김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기간도 길지 않았다.
1960년 NFL의 가입이 거절된 일부 구단주들과 NFL 구단의 소수 주주들이 아메리칸풋볼리그(AFL)를 만들었다. NFL은 또 다시 강한 외부의 도전을 받았다. 루니는 1970년 NFL이 AFL을 통합해 26개 구단으로 재편되고 결과적으로 모든 구단에게 이득이 돌아갈 수 있도록 중재자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1970~80년대 NFL 선수와 구단 사이에서 임금 문제로 갈등이 잦았을 때도 루니가 등장했다. 루니는 다른 구단주들과는 달리 별다른 잡음을 만들지 않고 사안을 조율하며 무난하게 노동 문제를 해결했다. 루니는 여러 이견을 잘 조율해 이해 당사자 모두가 만족하는 결과를 내놓는 데 탁월한 능력을 지녔다.
그는 바닥까지 훑을 정도로 구단과 선수, 스포츠 기획사 등의 사정을 꿰뚫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1982년 그는 시즌 절반이나 파업으로 이끌었던 NFL의 단체교섭 협상에서 선수, 구단주 모두에게 신뢰를 받으며 합의점을 이끌어 냈다. 1993년에는 구단이 선수에게 지불할 수 있는 연봉 총액의 상한을 설정한 ‘샐러리캡’을 설계하기도 했다.
2009년 당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루니를 아일랜드 주재 미국 대사로 임명했다. 평생 공화당원이었던 루니는 2008년 1월 당시 오바마의 아이오와 코커스 승리연설을 보고 반해 오바마의 지지자로 돌아섰다.
이후 루니는 대선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 펜실베이니아 주 선거에서 오바마가 공화당의 존 매케인 후보를 누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오바마 당시 대통령은 루니를 대사로 지명하면서 “아일랜드의 평화, 문화, 교육에 대한 변함없는 지지자였다”고 소개했다.
루니는 아일랜드 이민자 후손답게 1970년대 아일랜드의 평화와 통합을 지원하는 ‘아일랜드 펀드’를 다른 후원자들과 함께 설립했다. 이 펀드는 3억 달러(약 3378억 원) 이상을 아일랜드 평화와 경제 발전을 위해 투자했다.
루니는 70대 후반이라는 매우 늦은 나이에 외교관으로 변신했지만 매우 열정적으로 일했다. 대사 임기를 마친 2012년까지 아일랜드의 32개 카운티를 모두 방문했다. 그 당시까지 32개 카운티를 모두 방문한 미국 대사는 루니가 유일했다.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루니가 별세하자 “고인은 내 친구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더 중요하게는 피츠버그 시민들의 친구였으며, 모범 시민이자 미국을 명예롭게 세계 무대에 소개한 인물이었다”고 애도했다.
이유종 동아일보 기자 pe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