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렌소 세르비트헤
미주 유럽 아시아를 아우르는 글로벌 식품 기업 ‘빔보(Bimbo)’의 창업주 로렌소 세르비트헤가 2017년 2월 3일 멕시코시티 자택에서 별세했다. 향년 98세.
‘제빵왕’ 세르비트헤는 아버지의 작은 빵집을 물려받아 세계 1위의 제빵회사로 키운 멕시코의 대표적인 기업인이다. 빔보는 현재 미국 멕시코 등 22개국에서 170여 개의 식품 가공 공장을 운영하며 1만 종류 이상의 제품을 생산한다.
직원만 13만 명에 달하며 트럭 등 운송수단만 1만 1000대 이상을 가지고 있다. 2014년 매출액은 141억 달러(약 16조 2150억 원). 미국의 굵직한 식품 기업들을 연이어 인수한 그의 장례식에는 엔리케 페나 니에토 현 멕시코 대통령 등 정재계 인사들이 대거 참석했다.
1918년 11월 멕시코시티에서 태어난 세르비트헤는 스페인 이민자의 아들이다. 그의 아버지 후안은 카탈루냐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고 더 나은 미래를 꿈꾸며 1903년 스페인 언어권인 멕시코로 이주했다. 1928년 시내에 빵집 ‘엘 몰리노’를 세웠다. 빵집은 제법 운영이 잘 됐다.
세르비트헤는 고교를 졸업한 뒤 아버지를 도울 목적으로 멕시코국립자치대에 진학해서 가게 운영과 연관성이 큰 회계학을 배웠다. 그러나 1936년 후안이 갑작스럽게 타계하면서 학업을 포기해야 했다. 그는 가족의 생계뿐만 아니라 빵집 운영까지 맡아야 했다.
세르비트헤는 열여섯 살 때부터 틈틈이 아버지의 빵집에서 일했다. 그는 빵집 운영에 대해 바닥부터 훑을 정도로 잘 알고 있었다. 현명한 가업 후계자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그는 아버지의 사업 규모를 뛰어넘어야 겠다는 비전을 지녔다. 그는 미국의 현대적인 제빵 기술에 주목했다.
미국의 현대적인 식품 기업들처럼 다양한 종류의 빵을 대량 생산해서 멕시코 시장에 출시하고 싶었다. 오랫동안 이런 구상을 가지고 있었지만 제2차 세계 대전으로 경제 사정이 좋지 않았고 계획은 미뤄졌다. 전쟁이 종료된 뒤인 1945년 12월 외삼촌, 남동생 등 카탈루냐 출신 가족, 친지를 중심으로 제빵회사를 설립했다. 자본금 30만 페소는 친척, 가족으로부터 모아 충당했다.
전쟁 직후라 제빵기와 차량 등을 확보하는 게 쉽지는 않았다. 세르비트헤는 영업직 10명을 포함해 친지, ‘엘 몰리노’ 출신으로 임직원 38명을 모았다. 재료, 제품을 운반할 트럭 10대를 확보했고 미국제 중고 오븐도 2개 구입했다.
회사명은 사람들이 뭔가 하려던 것을 해냈을 때 외치는 단어인 ‘빙고(bingo)’와 월트 디즈니의 만화영화 제목인 ‘밤비(bambi)’를 조합해 ‘빔보(bimbo)’라는 신조어를 만들었다. 빔보는 영어로 ‘섹시한 외모에 머리가 빈 여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나 세르비트헤는 다른 의도로 사명을 지었다.
당시 빵은 매우 부족했다. 멕시코시티 빵집들은 거대한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었다. 모두 스페인계로 반독점법을 무력화시키면서 가격 인상을 주도하고 있었다. 마누엘 아빌라 카마초 당시 멕시코 대통령(1940~1946년 재임)도 이 카르텔의 가격 인상 압박에 굴복할 정도였다.
세르비트헤는 슬라이스 빵에 주목했다. ‘엘 몰리노’에서 팔던 샌드위치에 필요한 슬라이스 빵은 카르텔의 압박 등 별다른 규제를 받지 않았다. 멕시코시티에서는 ‘판 이데알(Pan Ideal)’이라는 작은 제빵회사만 슬라이스 빵을 팔고 있었다.
그는 직접 시내를 돌며 빵집들을 대상으로 슬라이스 빵의 판매 가능성 등에 대한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당시 멕시코에서 통계를 활용해 기업 경영에 반영하는 회사 자체가 거의 없던 시절이었다. 합리적인 가격에 슬라이스 빵을 내놓을 수 있다는 판단을 내려졌다.
카마초 대통령도 빵 부족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라 밀가루 구입, 제빵기 수입 등에 필요한 모든 행정 절차를 도왔다. 첫 제품은 4가지 종류의 빵이었다. 빔보는 흰 빵 두 종류와 호밀빵, 토스트용 슬라이스 빵을 만들었다.
빵집 주인이었던 세르비트헤는 빵의 품질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당시 멕시코 노동자 계층의 가정에서는 비위생적인 시설의 동네 빵집에서 만든 빵을 사서 먹을 때가 많았다. 이런 빵마저 빵집 주인의 개인적인 사정으로 자주 보급되지 않았다. 빵이 보급되지 않으면 꼼짝 않고 굶어야 했다.
세르비트헤는 이런 실태를 간파했다. 빵에 곰팡이가 피거나 상하지 않게 매우 신경을 썼다. 미국 캔자스 주에서 제빵 기술을 배운 제빵사들로 팀을 꾸려 이런 문제를 해결했다. 경쟁 기업의 슬라이스 빵에선 곰팡이가 피기도 했다.
빔보는 빵을 셀로판지에 포장해서 팔았다. 당시 대부분의 빵집들은 기름종이에 빵을 담았다. 셀로판지에 빵을 담으면 소비자들이 내용물을 직접 확인할 수 있어서 부패 여부가 쉽게 판별된다. 빔보의 위생적인 빵은 경쟁 제빵기업, 비위생적인 동네빵집들의 빵과 비교할 때 큰 차이점을 드러냈다.
빔보는 1948년 말까지 9가지 종류의 빵을 시장에 내놓았다. 핫도그, 햄버거, 도넛 등 미국에서 잘 팔리는 새로운 종류의 빵도 구비했다. 하지만 1950년대만 해도 빔보의 빵이 동네 빵집에서 만든 빵 보다 월등하게 더 잘 팔리진 않았다.
대신 대량 생산된 빵의 소비량은 꾸준히 늘었고 빔보는 시장 점유율을 높여갔다. 빵을 작은 조각으로 나눠 팔아서 저렴한 가격에도 소비자가 구입할 수 있도록 했다. 이런 전략은 곧 수요 창출로 이어졌다.
판매는 처음부터 자세하게 계획해서 직간접적인 유통망을 구축했다. 영리한 세르비트헤는 기본적으로 촘촘한 신문 유통망을 활용해서 빵을 팔았다. 철도, 항공, 호텔, 병원, 난민 수용소 등 대형 고객은 따로 관리했다. 빵의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 당일 배달 원칙도 세웠다.
1952년 세르비트헤는 미 육군의 운송 시스템을 본뜬 자체 배송 시스템을 완성했다. 빔보가 자체 개발한 주행속도계를 트럭에 부착하고 아침에 출발한 트럭은 그날 되돌아오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별도의 회사에 신문, 방송 광고를 맡겼고 1951년 업계 최초로 상품 이벤트를 진행했다.
매우 신중하고 사려 깊은 경영인이었던 세르비트헤는 빵의 식감, 신선도, 매장 진열, 재고 관리, 서비스, 광고, 배송 등 모든 것을 꼼꼼하게 따졌다.
멕시코 인구가 늘면서 과자 수요도 늘어났다. 빔보는 1956년 마리넬라 공장을 세우고 페이스트리, 과자 등으로 품목을 확대했다. 또 제조부터 유통까지 모두 책임지는 수직 계열화를 구축했다. 국내 시장에서 경쟁자들이 시장에 아예 진입하지 못하도록 사전에 봉쇄하는 전략도 마련했다.
미국의 거대 제과기업인 원더브레드가 멕시코 시장에 진출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미리 꿰뚫어 보고 사전에 원더브레드의 멕시코 시장 총판을 인수했다. 경쟁 자체를 막은 것이다.
세르비트헤는 이런 방법으로 빔보의 국내 시장 점유율을 90%까지 끌어올렸다. 또 제빵뿐만 아니라 과자, 캔디, 초콜릿 등 가공음식 사업에 폭넓게 진출했고 독보적인 사업자로 자리매김을 했다.
해외시장에도 진출했다. 1984년 빔보는 멕시코에서 생산된 빵을 이웃 국가인 미국에 수출했다. 멕시코 국경에서 가까운 미국 남부지역을 중심으로 유통망을 다졌다. 1989년 과테말라, 1991년 아르헨티나에 공장을 지었다.
세르비트헤는 크고 작은 전세계 제과 및 제빵 기업들을 차례로 인수하면서 끊임 없이 몸집을 불렸다. 1998년 미국의 미시즈베어드를 인수했고 2001년 브라질의 ‘플러스 비타 앤드 풀맨’을 넘겨받았다. 2006년 중국 베이징의 판리코를 인수해 아시아 시장에도 진출했으며 2009년 웨스톤푸드를 차지하면서 미국에서 가장 큰 제과회사가 됐다.
이후에도 캐나다 스페인 포르투갈 아르헨티나 등의 식품 회사들을 합병하면서 ‘세계에서 가장 큰 제과기업’이라는 자리에 올랐다. 빔보는 2013년 기준으로 멕시코에서 9번째로 큰 기업집단에 기록됐다. 빔보는 현재 빔보, 마리넬라, 리콜리노, 바르셀 등 100개 이상의 식음료 브랜드를 가지고 있으며 미 경제지 포브스는 지난해 빔보를 ‘포브스 글로벌 2000대 기업’ 중 986위에 올렸다.
‘멕시코의 상징’의 저자 로버트 웨이스 노던콜로라도대 교수는 “빔보는 미국화의 첨병이라는 지위를 뛰어넘어 멕시코혁명의 문화적인 기풍에다 현대 미국 문화를 포용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세르비트헤는 신중하고 열정적인 인물이었다. 또 매우 창의적인 인물이기도 했다. 빔보의 성공은 대부분 그의 차별화 된 생각에서 비롯됐다. 또 그는 자신에게 매우 엄격했다. 높은 수준의 기준을 제시하며 계차근차근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빔보의 경영 스타일은 카탈루냐 사람들의 비즈니스 문화를 고스란히 빼닮았다. 빔보는 유동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항상 여윳 자금을 지녔다. 1951년에만 재료값, 인건비 등을 지급하기 위해 돈을 꿨을 뿐이다. 안정적인 재무구조를 유지해서 기업의 도산 가능성이 매우 적어진다. 거래처에는 물건값의 80%를 현금으로 지급했다. 거래처들은 이런 빔보의 경영 방식에 크게 감사하며 신뢰하게 됐다.
세르비트헤는 기독교 휴머니즘과 포디즘(포드주의)에 근거해서 ‘기업은 고도로 생산적이어야 하고 깊게 인간적이어야 한다’는 경영 철학으로 기업을 경영했다. 포디즘은 미국의 '자동차왕' 헨리 포드(1863~1947년)가 창안한 대량생산 방식의 경영 철학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선진국가에서 나타난 대량생산 및 대량소비의 경제성장 체제를 말하기도 한다.
세르비트헤는 높은 생산성을 추구했지만 휴머니즘에 근거해 직원들의 복지도 최우선으로 여겼다. 그는 직원들에게 식품업계 임금의 3배를 지급했다. 1914년 포드가 공장 생산직 직원의 임금을 하루 2.34 달러에서 5달러로 인상하며 이직률, 업무 교육비용을 낮추고 직원 충성도, 생산성을 높여 결과적으로 회사가 큰 이득을 얻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
생산성에 따른 상여금도 철저하게 지급했다. 회사 수익의 8%는 항상 임직원 복지에 사용했다. 직원들에게 주택, 학교를 마련했을 뿐만 아니라 아니라 사원들을 위한 저축은행까지 설립했다. 직원들은 회사와 자신이 하나라는 생각을 지니게 됐고 열심히 일할 수 밖에 없었다.
세르비트헤는 1981년까지 최고경영자(CEO) 자리를 지켰다. 1994년 이사회 의장을 마지막으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의 아들 다니엘 세르비트헤는 현재 빔보의 CEO 겸 이사회 의장을 맡고 있다. 빔보의 신화는 계속된다.
이유종 동아일보 기자 pe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