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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르아미 Jan 22. 2024

죄책감과 책임감



아빠의 재활은 가끔 미세먼지 하나 없이 맑은 날처럼 시원하고 개운하게 진행되다가 종종 안개가 자욱해서 도로의 모든 차가 다 비상등을 켜고 가는데 아빠만 홀로 역주행하는 것 같이 그렇게 흘러가버린다.

그 ‘종종’ 중에 어느 시점이었다. 아빠가 천포창(간단히 말하면 피부에 물집이 생기는 질환으로 자가면역질환이라고 할 수 있다.)으로 거의 반년 넘게 전쟁을 하면서 그중에서도 한 세 달은 정말 병원에 돈만 버렸다고 할 수 있을 수준으로 재활을 할 때였다. 그 무렵부터 나도 엄마도 나무의 작은 가지부터 바람에 부러져나가듯 의지도 체력도 조금씩 떨어지고 있었다. 재활만으로도 우리 세 사람은 벅찬데 자가면역질환이라니. 견딜 수 있는 시련만 준다는 그 대단하신 존재께서는 나를 부처라고 생각하는 건지 조용할 날 없는 인생을 끊임없이 선물해주고 있었다.



사람이 지쳐서 그런지 잡생각이 자꾸 내 소매단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그리 복잡하지 않은 성격 덕분에 시간 좀 쓰면서 툭툭 털어내면 말 같지도 않았던 생각들은 대부분 떨어져 나갔다. 그런데 아빠가 퇴원하기 전부터 내 마음속 어디에 깊게 자리하고 있던 그것이 이제는 내 밖으로 나와 점점 외면할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형체만 있지 주제가 불분명한 이건 내가 멍 때리는 와중에 불쑥 나타나 몇 분씩 생각하게 만들었다. 몇 개월을 생각했다. (정말 몇 개월이었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거 외에는 곱씹으며 길게 생각하는 인물이 아니다. 근데 이 모호한 정체의 생각이 개월로 넘어가니 도저히 찝찝해서 다른 일에 집중이 안 됐다. 간병을 시작한 이후로 아빠와 관련된 일 외에는 집중력이 점점 떨어져서 미치고 환장할 와중에 의외의 복병까지 등장하다니. 그래도 다행스러운 건 몇 달 동안 그 생각에 하루 오분 길면 삼십 분씩 투자(?) 한 결과 구체화 되어 이제 명확하게 내 앞에 질문을 들고 나타난 것이다.


이렇게 (거의) 모든 걸 포기하면서 아빠의 재활에 매달리는 진짜 이유가 뭐지?



어쩌면 나의 변해버린 일상을 알고 있는 주위사람들이라면 한 번쯤 해볼 만한 질문이었다. 8개월의 병원 생활, 퇴원을 하고 나서도 2년 가까이 나의 자유는 거의 포기하고 주중 3일은 아빠의 재활에 시간을 쏟고 주말은 쉬지 못하고 일을 하는 삶. 당연히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힘들어서 이쯤 되면 그만할 법도 한데 왜 아직도 매달리고 있는지.


몇 년간의 내 삶을 관통한 질문이 발등에 떨어지자 의외로 생각은 쉽게 정리됐다. 그 생각 중 첫 번째로 정리된 사실은 아빠를 간병하는 것으로 난 가족이든 타인이든 간에 그 사이에서 ‘효녀’ 타이틀은 얻고 싶은 게 아니라는 것. 아빠랑 오지게 싸워서 주는 파이터의 타이틀은 영광으로 생각하고 받겠지만 효녀? 글쎄. 간병을 한다고 효녀라는 별칭을 얻기에 난 과거 불속성으로 만렙을 찍은 불효녀라 그걸 지금 효녀로 까줘도 아직도 불효녀 마일리지가 한참 남아서 양심상 정중히 사양한다. (효녀로 인정받고 싶은 게 당신의 본심이라고 누군가 우긴다면 반박 시 네 말이 다 맞으십니다.)


두 번째로 정리된 건 수술 후 재활이 시작될 즈음부터 오랫동안, 어쩌면 영원히 튀어나오지 않게 자그마한 상자에 담아 쇠사슬로 칭칭 감고 8자리 비밀번호의 자물쇠로 잠가서 열쇠는 한강에 버린 뒤 저기 어디 원단 서랍 가장 안쪽에 넣어둔 그런 사실이었다.

그 사실은 아빠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살렸다는 ‘죄책감’ 그리고 같이 따라오는 ‘책임’

엄마가 들으면 인생을 자기 맘대로 사는 너에게 참 어울리지 않는 말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난 그렇게 설명하고 싶다. 삶이란 본인의 의지와 뜻을 베이스로 세상을 경험하고 타인의 의견을 듣고 수용하고 고쳐가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우린 아빠의 베이스를 무시하고 다시 살아가게 만들었으니 이제 죽는 순간까지는 본인이 영위했던 수준에 못 미치더라도 어느 정도까지는 비슷하게 만들어 줘야 한다는 것이 내가 짊어진 책임이었다. (요약하자면 살리는 것을 선택한 사람의 책임감을 내가 이미 느끼고 있었다는 것.)

죄책감은 그 책임을 가지기 전 시작된 작은 감정이었지만 아빠가 피부질환을 앓은 뒤 책임만큼이나 커져버렸다. 아직도 생생하다. 종아리와 발바닥을 뒤덮은 수포가 다 터져서 저녁에 교체한 드레싱 폼이 진물을 뱉어낼 정도로 심했던 날이었다. 아파서 하루이틀 쉬다 보면 아주 조금씩 좋아지던 몸이 다시 곤두박질칠까 봐 아침부터 병원에 안 가겠다고 울던 아빠를 억지로 끌고 재활을 갔다. 첫 수업인 작업치료를 마치고 경사침대(침대처럼 생겼지만 환자를 침대에 묶어 경사도를 높여가며 세우는 기계)에 억지로 태웠다. 나도 징그러운 인간이다. 좀 봐줄 수도 있는데 그걸 꼭 해야 한다고 누워있어도 괴로운 사람을 세워뒀다.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경사침대에서 25분 동안 매여있던 아빠는 내려서 1대 1 운동치료를 안 하겠다고 온갖 짜증을 다 냈다. 치료사 선생님도 역정 내는 아빠를 보고 아무래도 이 상태로 재활은 의미가 없다고 좀 달래 보자고 했다. 그런데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난 아빠를 달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재활과 밖으로 나온 아빠에게 병원에 왔으니 오늘치 운동은 다 해야 한다고 했지만 오히려 화만 더 돋우는 대화였고 억지로 다시 들어가려고 하자 결국 아빠는 건강하고 다부진 왼 주먹으로 내 얼굴에 펀치를 날렸다. 턱뼈를 스치듯 맞아서 다행히 치아는 지켰지만 그 찰나에 마주친 아빠의 눈빛은 형용할 수 없는 분노와 원망이 섞여있었다. 순간 속상해서 눈물이 날 뻔했지만 그 핏대선 눈빛이 심장을 내려앉게 만들어서 쏙 들어갔다. 그동안 재활을 하면서 내 몸의 반이 의지만으로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수도 없이 느꼈을 텐데 그때마다 얼마나 좌절을 했을까… 이건 내가 원한 삶이 아니라고 누가 살려달고 했냐고 외치고 싶었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자 마음속 깊이 숨겨둔 그 마음이 결국 큰 해일처럼 날 덮쳤다.  


다른 가족들은 이렇게까지 생각하지 않는 걸 안다. 누군가는 너무 과도한 감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아빠랑 성격이 비슷해서 그런지 자꾸만 공감이 가고 마음이 쓰인다. 똑같은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면 살리지 말아 달라고 유언처럼 남길 것이고 혹여나 내 의지와 상관없이 살아나서 말도 못 하고 신체의 반도 못쓰게 됐다면 절망과 우울, 분노에 사로잡혀 내 삶을 대신 선택한 사람을 원망할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원망받을 준비까지 되어있다. 그거까지 내 몫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그 원망과 죄책감에 짓눌리지 않으려 한다. 부정적 감정에 사로 잡혀 우리가 신나게 웃으며 행복한 순간들 마저 먹칠할 수없다. 그저 이 상황에서 파생된 감정들은 그 자리에서 그만큼의 역할만 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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