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네가다 (Anegada)

B cut

by LHS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총 네 번에 걸쳐 카리브해를 탐험하면서 (정작 본인은 인도를 발견했다 생각했지만) 카리브해의 많은 섬에 이름을 붙였다. 때로는 카톨릭 성인의 이름을, 때로는 발견한 날의 요일을... 하지만 때로는 매우 직관적으로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그 대표적인 섬이 바로 아네가다. 스페인어로 '침수된'이라는 뜻인데, 섬이 워낙 고도가 낮은 탓에 (섬의 가장 높은 지점이 해발 8.5m에 불과할 정도) 섬 곳곳에 바닷물이 밀고 들어와 있을 지경이니 그 이상 직관적인 이름이 있을까 싶다.


그래서 오늘날 토르톨라 (Tortola) 및 버진 고다 (Virgin Gorda) 섬과 함께 영국령 버진 제도에 묶여 있음에도, 이 섬이 보여주는 자연의 모습은 나머지 두 섬과 완전히 다르다. 그렇기에, 비록 도달하기 쉬운 곳은 아니지만 기왕 영국령 버진 제도까지 왔다면 꼭 들러가는 것을 추천한다.


페리가 내리는 아네가다 섬의 Setting Point. 일평균 관광객 수가 200여 명에 불과한 만큼, 서두를 필요는 없다. 그런데... 산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차를 빌려 달려 보아도 끝없이 평평한 지형만 이어지는 독특한 경관.


그러다 보니 섬 곳곳에 바닷물이 밀고 들어와 염호를 형성하고 있다. 염호에서 바다를 바라보니 한없이 얕은 바다가 끝없이 펼쳐져 있고.


오히려 섬 내부에 형성된 염호가 더 깊어보일 지경.


얕은 앞바다를 걸어 본다. 한참을 걸어도 발목까지밖에 차지 않는 바닷물. 세상 끝에 혼자 서있는 느낌이 황홀함을 넘어 엄숙함을 자아낼 지경이다.


문득 뒤를 돌아보니 아뿔싸. 도로변에 세워둔 차가 벌써 한참 멀어져 버렸다. 하지만 당황할 것은 없고, 바닥에 찍힌 발자국이 있으니 조심스레 돌아가면 되겠지.


전망대에서 바라본 바다의 모습. 야트막한 관목의 숲 너머 보이는 바다빛이, 부족한 상상력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다. 참고로 저 멀리 보이는 산은 버진 고다 섬.


특이하게도 이 섬에는 나귀가 아닌 염소떼가 다닌다. 나귀가 보이지 않는 것은. 이 섬에 염전이 없었던 관계로 나귀의 노동력이 필요 없어서였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이 섬에는 소떼도 다닌다! 다만, 차나 사람을 봐도 원체 신경을 쓰질 않으니, 서로 예의만 지키면 위험할 이유는 없다.


차를 달려 섬의 동쪽 해변에 도착. 서쪽 해변처럼 말도 안 되는 얕은 바다는 아니지만, 그래도 여전히 한없이 아름다운 풍경. 여기에 벤치를 설치해준 마음이 고맙다.


하지만 불과 몇 분만에 몰아치는 소나기. 섬이 산 하나 없이 평평하니 구름도 거리낌 없이 순식간에 비를 뿌리고 가는 것이 아닐까. 여튼 비를 피해 해변의 레스토랑에 몸을 숨긴다.


몸을 숨긴 김에 conch fritter를 아침 삼아 주문. 생각 외의 맛에 놀라며 허겁지겁 먹는 사이 비가 어느새 그쳤다.


다시 차를 몰아 서쪽 해변에 도달. 다시 봐도 환상적인 풍경이다.


그 환상적인 풍경에 조각배를 위한 작은 부두가 더해지니, 같은 바다인데도 그 느낌이 다채로워지는 느낌.


다시 차를 몰아 북쪽 해변에 도착하니 고맙게도 비치바가 있다. 외관이 다소 허름해 보일지언정, 이런 곳에서 먹고 마시는 감성은 그 어디에서도 재현이 불가하다.


이번에도 바닷가에 벤치를 가져다 둔 누군가의 착한 마음. 그런데 파라솔 없으면 30분만 앉아 있어도 화상 입을텐데... 반쪽만 착한 마음일까?


드디어 호텔에 도착. 섬에 몇 개 없는 호텔 중 하나로, 특이한 양식으로 지어진 빌라들이 바닷가에 줄지어 있다.


바다에서 무심하게 윈드 서핑을 즐기는 투숙객.


호텔의 풀로 돌아와 칵테일을 주문한다. 달콤함과 청량감이 공존하는 휴식의 순간.


풀에서 몸을 휘젓고 있으면 배가 고파지는 것은 당연한 일. 풀 옆의 바로 가서 fried lambi (conch 조개의 일종) 를 주문한다.


Lambi를 즐기다 문득 시계를 보니 곧 해가 질 시간. 부리나케 차를 몰아 섬의 서쪽 해변으로 향한다. 이미 시작된 석양에 붉게 물들기 시작하는 하늘. 다행히도 딱 맞춰온 모양.


해가 온 세상을 붉게 물들이고 있다.


하지만 그 위세를 금방 거두고 내일을 기약하는 해의 모습.


석양을 즐기고 호텔에 돌아오니 호텔 위 하늘도 석양의 마지막 순간에 난리가 났다. 빈약한 상상력으로는 절대 만들어낼 수 없는 자연의 경이.


석양이 끝날 때 맞추어 받아든 랍스터. 아까 fried lambi도 그랬지만 내공이 만만치 않다. 그날 저녁 유일한 식당 손님이었지만 외로움 대신 즐거움으로 가득했던 저녁.


새벽에 맞추어 해변에 나가보니 또 새로운 하루의 해가 떠오르고 있다. 잠시 앞바다에 비를 내리고 있는 비구름에 갇혀 있지만, 곧 떠올라 구름을 압도하리라.


해와 구름의 싸움을 뒤로 하고 (둘이 원만히 합의하시길), 받아든 아침. 에스프레소가 마시고 싶다는 말에 자신이 사용하는 머신까지 가져와 커피를 내려준 사장의 투박한 정이 고맙다.


아네가다 섬의 공항. 아무도 없다. 이래서 출발 시간 20분 전에만 가있으면 된다고 했던 거구나.


아무도 없는 '터미널'. 출발 시간 10분 전에서야 직원이 헐레벌떡 들어와 공항세 5불을 받아간다. 체크인도 보안 검색도 없다.


'터미널'에서 바라본 활주로와 주기장의 모습. 이렇게 헐렁한 공항 본 적 있는가.


그래도 시간 맞춰 도착한 비행기. 조종사가 후다닥 뛰어와 이름을 묻더니, 오늘 유일한 승객이라며 짐을 들고 성큼성큼 앞서간다. 세상 가장 간단했던 탑승 경험.


막 이륙한 비행기에서 보이는 섬. 길 두 가닥을 빼고는 끝없는 관목의 숲과 바다뿐, 때묻지 않은 자연의 모습 그대로. 이 느낌 또 느껴볼 수 있을 때까지, 일단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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