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나라 별로 조금씩 다르기야 하겠지만, 보통 한 나라의 국기에는 그 나라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나 상징물을 그려 넣기 마련이다. 그래서 바하마의 국기에는 푸른 바다와 노란 해변이 등장하며, 안티가 바부다의 국기에는 푸른 바다와 함께 금빛 태양이 그려져 있다.
그런데 난데 없이 향신료로 사용되는 nutmeg가 국기에 등장하는 곳이 있으니, 바로 그레나다이다. 그도 그럴 것이, 총면적 344㎢ (참고로 서울특별시 면적은 605㎢) 에 불과한 작은 섬나라임에도 한때 세계 2위의 nutmeg 생산국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세계 9위). 그레나다의 관광 캐치프레이즈 ‘The Spice of the Caribbean’은 이러한 사정을 반영한다.
그런데 그레나다 이곳 저곳을 다녀 보니 캐치프레이즈의 ‘spice’란 단어가 여간 잘 들어맞지 않는다. 아름다운 산과 바다, 잘 보존된 자연과 문화,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 역사의 흔적 등등. 음식에 비유하자면 향신료 많이 넣어 잘 버무린 느낌이랄까. 심심할 새가 없었다.
(이미 먼 옛날 이야기가 되어 버렸지만) 코로나19 관련 여행 규정이 추상같던 시절이 있었다. 대부분 카리브해 국가들이 1~2주 격리를 의무화해, 2~3주 여행할 시간과 돈이 있는 소수 관광객만 여행을 즐길 수 있었다 (백신 접종 본격화 이후 이 규정은 점차 완화된다).
그런데 그레나다의 의무 격리 기간이 단 4일이라는 것. 그렇다면 격리에 시간을 쓰고 나서도 1주일 조금 넘는 시간이면 여행이 가능하다는 의미. 당장 여행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출발일 당일 마이애미에서 그레나다행 항공기에 탑승했다. 당시 코로나19로 인한 여행객 감소로 마이애미발 항공편 하루 한 편 (그리고 뉴욕발 주 1회) 외에는 모두 운항 중단된 상태. 그런데도 탑승객은 다 합쳐 18명에 불과했다.
그런데 공항에서 격리 지시서를 받아 드니 5일간 격리 후 PCR 검사를 받으란다. 4일 격리 아니었냐 묻자 그새 규정이 강화되었다는 답이 돌아온다. 어이가 없어 찾아보니 실제로 출발일 전날 규정이 강화된 것. 그렇다면 받아 들이는 수밖에. 방역 택시를 타고 호텔로 향했다.
그래도 호텔 측에서 객실 한 동과 식당 한 곳 그리고 수영장까지 격리자 구역으로 지정해 두었고, 그 덕에 객실 내 감금은 피할 수 있었다. 바로 앞에 보이는 Grand Anse 해변으로 뛰어나갈 날만 손꼽아 기다리며 버텼고, 격리 4일차 하늘에 뜬 무지개는 좋은 징조일 것으로 믿었다.
그런데 무지개는 떴는데 정작 5일차에 호텔에 와야 할 PCR 검사원들이 오질 않는다. 호텔에 물어보니 시간 여유가 없거나 검사 인원이 적을 때 멋대로 건너뛰는 경우가 왕왕 있는 모양이다. 또 한번 받아 들이는 수밖에 없지만, 이제는 부아가 치민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항공편, 호텔, 렌터카 등 각종 예약을 변경해 두고 더 이상의 지연은 없기를 빌었다.
이렇게 지난한 과정을 거져 이메일로 격리 해제서를 전달 받은 시점은 격리 6일째 늦은 밤. 다음 날 아침이 되자마자 Grand Anse 해변으로 뛰쳐 나갔다. 참을 만큼 참다 디딘 해변은 정말 한없이 아름다웠다. 이 극한의 기쁨을 느끼게 해주려고 검사원들이 농땡이를 부린 모양이다.
대부분 카리브해 섬들이 그렇듯 그레나다도 화산 활동으로 형성된 섬이다. 그러니 해변 또한 화산암을 기반으로 형성된다. 풍화 작용이 충분치 않으면 자갈 해변이, 충분하면 검정 모래 해변이, 그리고 세월이 지나면서 산호나 조개 모래가 점차 덮이면 새하얀 모래 해변이 되기도 하는 것.
그래서 (일부 예외가 있지만) 그레나다 섬 대부분 해변은 모래가 거무튀튀하다. 그런데 모래가 거친 것도 아닌데 색깔 때문에 어딘가 거친 느낌을 준다. 그런데 이 느낌이 싫지가 않다. 정글도 강렬하니 모래도 강렬한 것이 오히려 어울리는 느낌. 짜장면에 숯불 갈비 얹어 먹는 강렬한 맛깔남이 이런 느낌일까.
과거 화산 활동의 증거는 해변 말고도 많다. Grand Etang이나 Antoine 호수와 같은 화구호도 여럿 존재하고, River Sallee Boiling Springs와 같이 황 냄새 가득한 곳도 존재한다.
그런데 그레나다 섬의 화산 활동은 도미니카 등 주변 다른 섬 대비 비교적 일찍 끝난 편이다. 그러다 보니 공기에서도 황 냄새가 물씬 나고 바닥에서는 황이 섞여 탁한 물이 보글보글 올라오는데, 정작 그 물은 더 이상 뜨겁지 않고 미지근한 수준이다. 무엇이든 화끈한 ‘The Spice of the Caribbean’ 치고는 순한 맛이랄까. 그래도 그만큼 자연재해의 가능성도 줄어드는 것이니 긍정적일 터. 이제는 편안한 마음으로 머드 마사지나 즐기면 될 듯하다.
미지근한 화산 활동이 못내 아쉬웠다면, 화끈한 럼과 향신료 여행을 떠나보자. 그레나다의 기후 및 토양은 각종 작물 재배에 천혜의 조건이 되어 주었고, 특히 nutmeg, mace, cardamom 등 향신료, 카카오, 사탕수수 등이 많이 재배되었다. 그러니 향신료는 신선할 수밖에 없고, 초콜릿 품질은 좋을 수밖에 없고, 여러 양조장에서 럼 등 다양한 주류를 생산할 수밖에 없는 것.
그러니 하루쯤은 과감히 자가 운전 대신 택시 투어에 몸을 맡겨 보자. 방법은 간단하다. 아침부터 반시계 방향으로 돌면서 만나는 양조장마다 들러 가는 것이다. Clarke’s Court에서 럼을 즐긴 다음 Blue Light에서 진으로 입가심을 한다. 그 다음 다시 Westerhall Estate에서 럼을 맛보고, Grenville에서 식사로 속을 달랜다. 그리고 River Antoine Estate에서 마지막 럼을 맛본 다음 Belmont Estate에서 초콜릿으로 입가심을 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양조장과 플랜테이션의 역사 및 문화 투어까지 자연스럽게 즐길 수 있으니, 하루가 아깝지 않다. 단, 각 양조장 및 플랜테이션 별 영업 시간이 상이하며 투어 예약이 필요할 수 있으니 사전 확인은 필수.
그레나다 전체 인구 13만 명 중 약 3만 5천 명이 수도 St. George’s에 모여 산다. 전국민의 30% 가까이가 한 도시에 모여 사는 셈이지만, 그래봐야 서울의 동 한 개 수준. 그러다 보니 도시가 작지만 시가지는 또 오밀조밀하게 형성되어 있다. 아름다운 산과 바다, 그 사이의 항구와 시가지 및 역사적 건물들, 그리고 그 사이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여 재미난 분위기를 선사한다.
이는 St. George’s 밖으로 나가도 마찬가지이다. 별 신경 쓰지 않고 지나칠 수도 있지만, 잘 찾아 보면 역사의 흔적이 곳곳에 숨어 있다. 오래된 교회부터 이제는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 공항 활주로까지 (지금은 동네 사람들이 이용하는 광활한 축구장이 된 듯 하다), 어디를 가든 옛날과 지금이 공존한다.
꼭 해봐야 할 일: 현지 초콜릿, 향신료, 럼 경험해 보기, 열대 우림 하이킹해보기, Grand Anse 해변 즐기기, 활기찬 나이트라이프에 빠져 보기, 군데군데 숨어 있는 역사의 흔적 찾아보기.
날씨/방문 최적기: 겨울 기준 매일 25~30도로 따뜻하며, 여름에도 겨울 대비 크게 더워지지 않음. 6월~12월 우기 및 12~1월 성수기 제외 시, 2~5월이 방문 최적기.
위치: 카리브해 남부 소앤틸리스 제도 (Lesser Antilles) 및 윈드워드 제도 (Windward Islands) 에 속하며, 트리니다드 섬 (Trinidad) 북쪽 약 140km에 위치.
시간대: 대서양 표준시 (한국보다 13시간 느림). DST (서머타임) 제도 없음.
항공편: 한국에서 뉴욕까지 이동 후 그레나다까지 직항편 이용 가능 (비행 시간은 5시간 선).
입국 요건: 그레나다는 대한민국과 사증면제협정 체결국으로 대한민국 국민은 무비자 입국 가능 (최장 90일이나, 항공권/숙박 등 여행 계획에 맞게 체류 기간 부여하니 유의).
화폐 및 여행 경비: 동카리브 달러 (XCD) 가 공식 화폐로, 고정 환율제 채택 (1 USD = 2.7 XCD). 미 달러 받는 곳도 많으니 (단, 거스름돈은 XCD로 줄 수 있음) 미 달러와 동카리브 달러를 동시 소지하고 환율 계산해 유리한 쪽을 사용하는 것을 권장. 아울러 신용카드가 널리 사용되나, 택시 등 현금 필요할 수 있고 ATM 찾기 어려울 수 있으니 충분한 현금 소지 권장.
언어: 영어가 공용어로 영어 의사 소통 문제 없으나, 현지인 간에는 Creole (현지어) 종종 사용.
교통: 산이 많고 도로가 좋지 않아 근거리 이동 외 차량 이용 필수. 택시 요금은 공항 기준 Grand Anse 지역은 15달러 선, St. George’s 지역은 20달러 선, 섬 종단 시 60~70달러 선. 렌터카는 하루 50~75달러 선이나, 좌측 통행이며 도로가 험해 운전에 자신 없는 경우 택시를 추천. 아울러 60 XCD에 temporary permit 발급 받아야 (3개월간 유효) 운전 가능하니 (경찰서 또는 일부 렌터카 업체에서 발급 가능), 차량 예약 시 temporary permit 발급 여부 확인 권장. 자세한 정보는 그레나다 관광청으로 (https://www.puregrenada.com/getting-around).
숙박: 대부분 숙소는 공항 근처, Grand Anse, True Blue 및 Lance aux Epines 지역에 위치. 대부분 일 200~300달러 선이며, 대부분 양호한 시설을 제공. Sandals, Silversands, Calabash 등 고급 호텔은 일 500달러 이상이므로 참고. 그 외 다양한 가격대의 빌라 렌트도 가능. 자세한 정보는 그레나다 관광청으로 (https://www.puregrenada.com/where-to-stay).
식당/바: Grand Anse, Lance aux Epines, True Blue 및 St. George’s 지역에는 식당과 바가 많이 있어 즐거운 식도락 생활 가능. Umbrella’s Beach Bar에서는 다양한 식사와 주류와 함께 Grand Anse 해변을 즐길 수 있음. Spice Affair의 인도 요리도 훌륭하며, 근처 West Indies Beer Company에서는 다양한 수제 맥주를 마시며 공연도 즐길 수 있음. Sails에서 항구를 바라보며 즐기는 다양한 해산물 요리도 훌륭. 자세한 정보는 그레나다 관광청으로 (https://www.puregrenada.com/where-to-eat).
전압/콘센트: 230V/50Hz에 플러그 타입 G 사용 (즉, 영국과 동일). 따라서 대부분 한국 전자기기의 경우 여행용 어댑터 필요.
국제전화 국가 번호: +1-473.
주요 연락처: 긴급전화 (경찰 911, 의료 434 (St. George’s)/724 (Grenville)), 그레나다 관광청 (+1-473-440-2001), 주트리니다드토바고 대한민국 대사관 (+1-868-622-9081/10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