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카리브해 대부분 섬들이 식민지이던 시절이 있었다.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미국, 스페인, 덴마크, 스웨덴 등등... 힘 좀 쓴다는 열강들은 모두 이 지역의 섬을 차지하기 위해 싸웠고, 대부분 섬들이 사탕수수 등 주요 작물을 재배하는 플랜테이션으로 활용됐다. 19세기 들어 히스파니올라 섬의 아이티와 도미니카 공화국이 독립했고 20세기 초 쿠바가 독립하기는 했지만, 그 외의 섬들은 20세기 중반까지도 여전히 식민지 신세를 면치 못했다.
하지만 1962년 자메이카를 필두로 나머지 나라들도 속속 독립을 시작한다. 1960년대에는 트리니다드 토바고와 바베이도스, 1970년대에는 바하마, 그레나다, 세인트 루시아 등등. 그리고 이 독립 릴레이의 마지막을 찍은 것이 바로 1983년 세인트 키츠 네비스이다. 2025년 기준으로 보아도 독립한지 아직 40여년에 불과한 신생 국가인 셈. 그래서 언뜻 생각에는 이 나라에 볼 것이 별로 많지 않을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이는 전혀 사실과 다르다. 17세기 초부터 이미 영국인들이 정착하기 시작해, 식민 역사로만 따지면 오히려 카리브해에서도 가장 긴 편에 들기 때문 (물론 영국인의 이주 전 원주민의 역사와 문화도 남아 있었다면 정말 좋았겠으나, 불행히도 카리브해 전역에 걸쳐 원주민의 흔적은 거의 지워져버렸다). 게다가 섬이 워낙 비옥해 농업 생산성이 높았던 탓에, 유럽 열강들이 장기간 쟁탈전을 벌이면서 Brimstone Hill 들 그 흔적까지 다수 남아있다. 거기에 빼어난 자연 환경은 기본값이니, 찾아가보지 않을 이유가 없다.
비행기가 착륙하기 몇 분 전, 세인트 키츠 섬의 동남쪽 끄트머리를 지난다. 좁은 해협 건너편 섬은 네비스.
착륙 직전 세인트 키츠의 풍경. 화산 자락이 해안가까지 내려온 형국이나 그래도 경사가 극심하지는 않으니, 해안가를 둘러가며 거주하면서 농사 짓기에 꽤나 유리할 듯.
섬의 동남쪽 Timothy Hill에서 바라본 북쪽 해안 풍경. 리조트가 여럿 들어서 있고, 그 뒤로는 본격적인 산지가 이어진다.
Timothy Hill에서 바라본 남쪽 풍경. 아름다운 곳 많은 이 섬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풍경 중 하나일 터. 섬 모양이 특이해, 동남쪽으로 10km 이상 이런 지협이 이어진다.
아마도 언덕 하나 하나가 과거 조그마한 화산이었고, 시간이 지나며 그 사이 사이가 퇴적물로 막혀 이런 지협이 길게 이어지게 된 것이 아닐까.
여튼 경치를 감상하며 조금씩 남쪽으로 내려가다 보니 끝이 보인다. 저 언덕만 넘어가면 네비스 섬으로 향하는 항구가 있고.
세인트 키츠 섬의 남쪽 끄트머리에 위치한 Cockleshell Bay Beach. 오늘 단체로 놀러 나오기라도 한 것일까. 흥겨운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다.
이제 수도인 Basseterre. 카리브해의 작은 섬나라 수도 (혹은 최대 도시) 를 보다 보면 공통적 특징이 있다. 일단 크루즈 터미널은 능력 범위 내에서 최대한 크게 짓는다.
그리고 도시의 주 성당 (어느 국가의 식민지였냐에 따라 영국 성공회일 수도 있고 카톨릭일 수도 있다) 은 원래부터 가급적 으리으리하게 지었기 때문에 여전히 크고 화려하다.
그리고 대부분 섬에 전사자 (대부분 1/2차 세계대전중) 추모 기념물이 존재한다. 유럽을 중심으로 일어난 전쟁이었지만, 대서양 건너 사람들까지 피해를 함께 입어야 했던 역사.
하지만, 그 외 시설들은 소박한 경우가 많다. 일례로 세인트 키츠 국립 박물관은 19세기 식민지 시절 재무부 건물을 그대로 사용중이다. 그나마 이정도면 국립 박물관 치고는 큰 편.
이 작은 3층 짜리 건물이 이 나라의 교육부 청사. 한국은 교육부 본청 소속 공무원만 700명에 교육 분야 공무원은 거의 37만 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되는데, 스케일 차이가 크다.
Berkeley Memorial. 시내 중심가 사거리 한복판에 세워진 기념물인데, 특이하게도 시계 아래에 음수대도 설치되어 있다. 아니, 저 찻길 가운데 들어가 물을 마시라고?
Carib 맥주 공장. 본사는 트리니다드 토바고에 있지만, 그레나다, 미국 플로리다와 함께 세인트 키츠에도 양조장이 있다. 이 지역을 여행하면 자주 마시게 되는 맥주.
Wingfield Estate에 도착. 영국인들이 1623년 처음 이 섬에 도착해, 제퍼슨 가문이 원주민에게 첫 정착지로 허락받은 땅이 바로 이곳 (음? 들어본 이름인데?).
맞다. 이들의 6대손이 바로 미국 3대 대통령이었던 토머스 제퍼슨이다. 엄청 유서 깊은 플랜테이션인 것. 꽤나 큰 규모였던지 플랜테이션 내에 사탕수수 운반 철도까지 설치했던 모양.
이제는 유적만 남아 있다지만 그래도 과거 얼마나 큰 규모로 설탕 및 럼 생산을 했었을지 능히 짐작이 간다. 저 구멍들에 솥을 걸어두고 사탕수수즙을 졸였으리라.
그리고 증류된 알콜은 이곳에서 나무통에 숙성시켜 럼을 만들었겠지. 카리브해 지역도 따지고 보면 제법 역사가 깊은 고장인 셈이랄까.
Saint Thomas 영국 성공회 교회. 17세기 초 카리브해에 처음으로 세워진 영국 성공회 교회이다.
Saint John's 영국 성공회 교회. 섬의 동북부 한적한 지역에 위치해 있는데, 바닷가 외딴 건물 분위기가 왜이리 감성적인지.
섬의 북쪽 끄트머리 Beaumont 공원의 풍차 유적. 바람의 힘을 이용해 사탕수수를 착즙했기 때문에, 이 섬 곳곳에 이러한 풍차 유적이 널려있다.
Brimstone Hill Fortress에 도착.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으니, 역사적 문화적 가치는 보장된 셈.
좁은 산길을 따라 구불구불 오르다 보면 꽤 큰 규모의 요새가 나타난다. 기생 화산 중 하나인 Brimstone Hill이 높이가 제법 되다 보니, 이를 방어에 활용한 것.
과거 영국과 프랑스가 이 풍요로운 섬을 두고 치열하게 싸우던 시절, 프랑스가 먼저 이곳에 대포를 설치했으나 이내 영국이 이곳을 빼앗아 요새를 건설했다.
치열한 영역다툼의 한가운데 건설된 요새라 그런지 만듦새가 꽤나 탄탄하다. 그나저나 대포가 대체 몇 대나 설치된 것인지.
과거 영국군이 이곳에서 산 아래 프랑스군에 무자비하게 대포를 쏘아댔으리라. 대포 위에 영국 왕실 마크가 새겨져 있다 ('ER'은 'Elizabeth Regina'를 의미).
1782년 프랑스가 이곳을 빼앗았지만, 이듬해 파리 조약으로 영국이 이곳을 다시 되찾는다. 이후 19세기 중반 병력 철수 시까지 영국은 이곳을 다시는 빼앗기지 않았다.
요새 안에 들어오면 생각보다도 넓은 공간이 확보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식량과 무기만 확보되어 있다면 장기간 공성전에도 너끈했을 듯.
하지만 요새 안에서도 최상단 성채에 이르려면 한번 더 언덕을 올라야 한다.
하지만 언덕을 오른만큼 절경이 반길 것이니, 오르는 편이 좋겠다. 이 정도 시야라면 과거 산 아래의 적이 이곳을 공격하기는 정말 어려웠으리라.
언덕 위 성채도 생각보다 큰 규모로 지어져 있다. 과거 영국 국기가 게양되어 있었겠지만 지금은 세인트 키츠 네비스 국기가 휘날리고 있다.
성채 안 공간도 널찍한 편. 과거 군사 훈련 등에 이용되었겠지. 그리고 이 공간을 둘러 화약 저장고, 식량 창고, 무기창 등이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성채 위로 올라오면 다시 성채를 둘러 포대가 촘촘하게 설치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곳에서 주변을 바라보니 시야를 가리는 것이 더이상 없다. 마치 이 주변 지역을 모두 소유하고 있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마지막 언덕까지 오른 것에 대한 보상인 양 아득한 바다 전망이 반긴다. 1983년 독립한 비교적 신생 국가라고만 생각했는데, 깊은 역사와 문화가 서린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