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제나 Jul 28. 2022

# 21. 두 번째 입원, 그리고 남편이 왔다.

나는 대학에서 의류학을 전공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왜 그 전공을 택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내가 어릴 적부터 줄곧 흥미 있어 했던 건 옷이 아니라 언어, 문학, 역사 같은 인문학적 분야였는데 무슨 배짱으로, 아니 무슨 생각으로 의류학을 전공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그때의 내 머릿속을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어쨌든, 어느 환경에서건 꾸역꾸역 견뎌내는 데는 무척 재능이 있었는지 4년간 대학에서 옷을 공부하고 대학을 졸업하고, 백화점 3층 매장의 한구석에 자리한 그렇게 유명하지 않은 어느 여성복 브랜드의 디자이너로 3년 가까이 근무했었다.

옷을 사 입는 건 참 좋아했지만 만드는 재주는 없었던 터라, 디자이너 생활도 나에겐 녹록지 않았다.

재미도 없었고 보람도 없었다.

그때부터 나의 장돌뱅이 생활이 시작됐나 보다.


대학 때 교내방송국 아나운서로 활동하며 여기저기서 작은 스포트라이트를 받다 보니, 내가 꽤나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었다.

아나운서를 준비하겠다며 잘 다니던 의류회사를 그만두고 내가 졸업한 학교에 계약직 조교로 들어가 일을 하며 아나운서가 되기 위한 준비를 하겠다고 설쳤다.

결과는 낙방.

뭐 그리 열심히 준비하지도 않았다.


외모 때문에 안되는 걸까 싶어, 방송국의 성우 시험도 봤었다.

그 당시 내 수험번호가 5515번이었던 것이 생각난다. 오랜 기간 성우 아카데미에 다녔다던

내 앞의 5514번은 최종 합격했지만

나는 낙방.

또 한 번 고배를 마셔야 했다.

그렇게 슬프거나 억울하지는 않았다.

남들처럼 모든 걸 다 바쳐 열심히 준비한 것도 아니었으니.


그렇게 서른 무렵까지 방황하던 끝에

영어학원의 상담교사,

안과의 코디네이터, 또다시 돌고 돌아 다시 대학교 계약 직원, 그리고 원단 컨버터까지.

지금 생각해 보면 안 해본 일이 없었던 것 같다.

안 해본 일이 없었다는 것은 장점보단 단점이 더 크다.


결론적으로 나는 전문성이 없는 사람이다.

어떤 한 분야에서 진득하니 경력을 쌓지 못하고

장돌뱅이처럼 2~3년 안에 이 직업에서 저 직업으로 갈아탄 탓에 나는 직업에서는 전문성 없는

그런 전업주부로 남았다.

직업을 잘 바꿔냈으니 그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랄까.


이런 탓에 아이를 데리고 어떤 직업을 가지고 먹고살아야 할지.

어떤 회사에서 날 받아줄지 참 막막하기만 했다.

먹고산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간호조무사 자격증을 따볼까.

조무사는 일단 자격증을 따게 되면 취업은 가능하다던데.

나이가 있어도, 급여는 적을지라도,

어디선가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던데.


아니면 보육교사 자격증을 따볼까.

어린이집에서 일하면 아들을 데리고 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이를 보육 시설에 맡겨놓고 돈을 벌어야 하는 현시점에서 어린이집 교사를 목표로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 도움이 될까?


잠도 오지 않는다.

낮에는 아이를 돌보느라 정신이 없고, 아이가 잠든 초저녁이 되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감 때문에 머릿속이 쉴 틈이 없다.


내게서 각서와 사실 확인서를 받아 자기 아들을 설득하겠다던 시부모에게선 일말의 연락도 없다.

애초에 기대하지도 않았다.

정말이지 가만히 있을 수는 없으니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을 뿐.

나에게서 각서를 받던 날, 시아버지가 내게 외쳤던 그 한마디가 떠오른다.


- 넌 악마야.


악마.

훗, 악마의 정의란 무엇인가.

내가 악마라면 나를 이렇게 만든 당신들은 루시퍼 쯤은 되지 않나?


그래. 사람은 상대적이고 늘 자기 입장에서 생각한다. 자신의 손녀딸을 사랑하지 않고, 귀한 아들에게 소리만 지르는 두 번째 며느리가 그의 눈에는 악마 같이 보였나 보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나는 그저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귀염둥이 아들을 보며 억장이 무너지는 시간을 버티고 있을 뿐이다.

다행히 아들은 징징거리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잘 울지도 않고 보채지도 않는,

그래서 유독 더 마음이 아픈 그런 착한 아들이다.


여느 때처럼 아침에 눈을 뜨면 아이가 우유를 달라고 엄마를 깨운다.

밤새 먹고 살 걱정에 잠이 오지 않아, 새벽에 겨우 눈을 붙였던 나는 나보다 더 부지런한 예쁜 아들이

잡아끄는 손에 이끌려 겨우 겨우 침대에서 무거운 몸을 일으킨다.

냉장고에 가서 아이가 좋아하는 아인슈타인 우유를 꺼내 빨대를 꽂아주고 잠시 텔레비전을 보게 한 뒤 나는 조금 더 눕는다.

가끔 우유를 들고 뒤뚱대며 방으로 와 짧은 다리로 겨우겨우 침대에 올라 내 옆에 눕는 아들을 보는 것이, 내 삶의 유일한 낙이었다.

내가 죽지 않고 꾸역꾸역 사는 이유.


아들이 우유를 다 먹을 때쯤 일어나 아이 아침식사를 준비하고 아이를 업은 채로 청소기를 민다.

그리고 놀이터에 나가 하루 종일 심심하고 지루했을 아들과 옆동에 사는 친한 엄마의 아이와 함께 놀이 시간을 갖게한다.


오후 늦은 시간이 되면 다들 남편과 아이를 위한 저녁식사를 준비하러 들어가고 나는 아들과 단둘이 빈집에 들어와 아이를 씻기고 저녁을 준비한다.

저녁을 먹고 혼자 씩씩하게 놀던 아들이 잠들면,

그때부터 인터넷을 켜고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내가 받을 수 있는 복지혜택은 무엇인가.

나와 같은 상황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까. 하며

오랜 시간 새벽이슬이 맺히는 시간까지 나는 컴퓨터 앞에 앉아서 눈에 핏발을 세운다.

그게 남편이 떠나고 난 자리에서 우리가 보내는 시간의 전부였다.


그러던 어느 날, 잠자리에 누운 아들이 계속 칭얼댄다. 위에서 말했듯 아들은 칭얼거리나 울거나 사람을 보채는 아이가 아니다.

내 아들이어서가 아니라 객관적으로 그런 아이였다.

근데 그런 아이가 저녁 7시부터 12시까지 쉬지 않고 울고 보채댄다.

이건 분명 아이가 잠투정을 하느라,

혹은 이가 나느라 아파서 우는 것이 아닌듯하다.


체온계를 가져와서 아이의 체온을 재보니 39도가 넘는다. 우선 가지고 있는 해열제를 먹이고 아이의 몸을 따뜻한 물수건으로 닦으며 열이 떨어져 보길 기다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아이의 열은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아들은 그 조그만 몸으로 계속해서

아픔을 토해낸다.

아이의 울음이 멈추질 않는다.

응급실에 가야 하나.

하지만 괜히 감기로 응급실에 갔다간 아이만 고생하고 돌아온다는 또래 엄마들의 얘기를 귀가 따갑게 들어왔다.


판단이 서질 않아.

어떻게 해야 하지.


윗집에 사는 나보다 육아 선배인 친한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12시가 다 된 시간이었는데 고맙게도 내 사정을 모두 아는 터라 한달음에 내달려왔다.

아들을 찬찬히 살피더니,


- 언니, 응급실 데려가야 할 것 같아.

내가 택시 부를 테니까 언니 빨리 짐 챙겨.


정신이 없어 아이 신발도 챙기지 못하고 택시에 오르는데 윗집 엄마가 아들의 슬리퍼를 챙겨서 택시로 던져준다.


- 언니 가서 진료 보고 연락해


나는 이 순간에도 눈물만 난다.

정말 강하지 못해.

엄마는 강하다던데 나는 그저 이런 상황에서도 울기만 하는 칠득인가보다.

정말 엄마 자격이 없어.


집에서 차로 10분 거리에는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대형병원이 두 개나 있다.

가장 유명하다는 병원으로 향했다.

응급실 진료를 보기 위해 아이를 아기 띠로 안고

진료 절차를 밟았다.

계속 우는 아들을 꼭 안고 간호사선생님이 우리 아들의 이름을 부르기만 계속해서 기다렸다.

마침내 우리의 순서가 왔다.

아들의 진료를 본 의사선생님은 그다지 편하지 않은 표정으로 아이를 살피더니 잠시 후 다시 진료를 보자셨다.


등신같이 왜 이렇게 눈물이 나는 거야.

불쌍한 내 새끼.

왜 나 같은 어미를 만나서 이런 고생을 해야 하는 거야.


스스로를 꾸짖고 질책하며, 끔찍한 시간을 견디고 있었다.

간호사가 다시 부른다.

두 번째 진료를 본 의사선생님이 사뭇 진지한 얼굴로 말한다.


- 입원 준비하셔야겠습니다.


이 병원은 중증의 환자들이 몰려드는 곳이다.

때문에 가벼운 질환이나 증상만으로는 결코 입원을 권하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병동이 모자라기 때문에 더 위중한, 더 급한 환자만

입원치료를 권하는 곳이다.

그런데 내 아들을 입원시키란다.


- 왜요 선생님?

  어디가 이상이 생긴 건가요?

  어디가 아픈 건가요?


- 폐렴과 천식이 의심됩니다.

  일단 기다리시면 간호사가 절차 설명해 드릴 겁니다.


억장이 무너진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아는가?

억장이 무너진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정말 그 심정이 어떤 건지 알고 입에 담는 걸까?

이 순간 나는 말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억장이 무너진다.

하느님 제발. 저를 이 지옥에서 구하소서.


입원실이 바로 비지 않아 응급실의 한 귀퉁이에서

아들에게 호흡기를 달게 하고 그 조그만 발에 링거 바늘을 꽂는 고통을 주었다.

아이가 자지러지는데 움직이지 못하게 내 무게로 아이를 누른다.

다행히 응급실 간호사 선생님께서 한 번에 정맥을 찾아 고통은 한 번으로 끝났다.

아이 아빠가 집을 나간 뒤, 처음엔 그에게 줄기차게 문자를 보냈다.

전화는 어차피 받지 않을 사람이니 문자라도 보내는 수밖에.


돌아와라,

잘못했다.

내가 더 잘하겠다.

딸아이도 내가 데리고 살겠다.

제발 돌아와라.


답도 없는 사람을 향해, 혼자만의 메아리는 계속되었다. 아들을 위해, 답 없는 내 인생을 위해

그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라 여겼다.

그러다 한 달이 채 못되고 나서 나는 문자 보내는 일을 그만두었다.

자존심이 상해서, 혹은 희망이 없어서.

그 무엇도 아니었다.

그저 지쳤을 뿐이다.


그렇게 아이 아빠가 집을 나가고 두 달이 넘었을 때

나는 다시 한번 문자를 보냈다.

새벽 네시가 넘어가는 시간.


- oo가 아파. **병원 응급실이야.


문자에 답은 없었지만 아침 7시가 다 된 시간에

그토록 기다렸던 그의 얼굴이 커튼 사이로 슬며시 보였다.


왜 나는 눈물이 나는 걸까.

나에게 폭언을 퍼부으며 나를 증오하던 그 얼굴이 그립기라도 했던 걸까.

그 사람이, 그 얼굴이 너무나 반가웠다.

얼마나 기다렸던 사람인가.

아이를 두 달 만에 본 남편은 아무 말 없이 아들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러고 한 시간쯤 지났을까 출근을 해야 한다며 돌아섰다.


아들은 입원실로 올라갔다.

너무 씩씩해서 돌보기가 힘에 부쳤을 정도였는데

풀 죽은 채로 병원 환자복을 입고 콧줄을 낀

내 심장, 내 아들.

그 조그만 몸에 주삿바늘을 몇 개나 꽂고 있는 건지.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내 심장 귀퉁이가 뜯겨나가는 것 같다.

입맛이 없는지 아들은 밥도 넘기지 못하고 풀 죽어 있다.

그 모습에 또 한 번 못난 어미는 억장이 무너진다.

정말 미안해. 내 아들아.


설마 입원을 하게 되리라곤 생각지도 못했을뿐더러

아이가 갑자기 아파 정신이 없어 미처 입원 준비를 하지 못했다.

그런데 부탁할 사람이 생각이 나질 않는다.

오빠랑 새언니는 회사에서 근무할 시간이고,

친정 부모님은 아들을 키우냐 마냐의 문제로 냉전 중이었으며, 남편이나 시댁은 내 연락을 받지도 않았던 상황이었다.

아이를 아기 띠로 안고 급하게 해결해야 할 기저귀와 우유를 사러 지하 마트에 다녀올 요량이었다.


내 인성에 문제가 있다고 늘 타박하던 시댁이었지만

문제 있는 인성에도 불구하고 친한 엄마들이 꽤 있었다.

아들 친구 엄마들뿐 아니라, 딸 친구 엄마 중에서도

소통하며 지내는 몇몇 엄마들이 있었던 터였다.

그중 한 엄마에게 전화가 온다.


- oo 입원했다는 소식 들었어.

나 지금 주차장인데 빨리 올라갈 테니 잠깐만 있어봐.


친하게 지내는 아들 친구 엄마 무리 중 한 엄마였다.

병실에 들어선 친구 엄마를 보니 또 눈물이 쏟아진다. 평소 나의 사정을 잘 알고 보듬어 주던 언니이다.

나를 보더니 언니도 눈물을 보인다.


- 입원 준비  해서 왔다며. 일단 급한 대로 내가 챙겨왔어. 우리   챙겨오느라 기저귀가 여아용이야. 일단 이거라도 쓰고.


기저귀, 우유, 아이 간식, 아이 숟가락, 그리고 내 세면도구와 수건, 속옷에, 간단히 마실 수 있는 믹스커피까지.

가슴이 뜨겁다.

가족에게도 형제에게도 남편에게도 부탁할 수 없었던 것들을 내가 먼저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도와주다니.

가슴의 멍울이 눈물이 되어 울컥하고 쏟아진다.

잊을 수 없다.

이렇게 고마운 사람을 어떻게 잊느냔 말이다.

아이와 남편을 주차장에 두고 왔다며 챙겨온 짐만 내려놓고 나를 한번 안아주고서야 언니는 병실을 나섰다.


친정 부모님도 시부모님도, 어느 누구도 찾아오지 않았다.

병실도 집과 마찬가지로 쓸쓸하기 짝이 없었다.

남편만 매일 저녁 찾아와 30분씩 나에게 씻을 시간을 주고 아이와 내가 조그만 침대에 함께 누우면

떠나곤 했다.


만나면 할 말이 많을 거라 여겼는데,

막상 매일같이 그를 보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두려웠다.

나에게 무슨 말을 할지.

정말로 끝내자고 하면 어쩌지.

두렵고 무서워 섣불리 그 어떤 말도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그저 '씻고 와' 라고 내뱉는 그의 한마디가 우리가

나누는 대화의 전부였다.


이전 20화 # 20. 너와 함께 살고 싶어. 내가 너의 엄마니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